호텔과 자존감을 선물하는 방법
어느 집에나 적당한 게 잘 없는데 웬만하면 사지 않는 물건이 있다. 하나가 있으면 두 개는 사치라고 여기곤 한다. 많이 비싸지도 않고 다이소에도 쿠팡에도 있는데 말이다. 꼭 가격 때문만은 아니다. 어떤 것을 사야 할지,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몰라서다.
바로 화병! 화병꽂이 수업을 하면 좋아들 하시는 이유이다. 드디어 예쁜 화병이 생겼다고 이제 잘 꽂을 수 있다고 하실 때 뭉클하게 기쁘다. 살까 말까 망설이셨을 순간들이 상상된다.
그렇기에 사진 찍을 용도가 아니면 꽃다발보다는 화병에 꽂은 꽃을 선물한다. 그대로 놓기만 하면 되니 받는 사람이 마음 편해한다. 내돈내산 하지 못하던 화병까지 생겨서 행복해하는 모습이 좋다. 꽃다발을 선물할 때도 가능하면 화병과 함께 드리곤 한다. 이렇게들 말씀하실 것을 알기에. "마땅한 화병이 없었는데 감사해요!" "꽃다발을 푸는 게 아까웠어요. 내가 다시 꽂으면 안 예뻐지더라고요." 내 친한 지인들은 그래서 다들 괜찮은 화병과 잘 드는 꽃가위까지 갖고 있다.
워낙 꽃 선물 이력이 쌓이다 보니 이맘때면 어떤 꽃이 최고로 환영받는지 안다. 요즘은 단연 작약이다. 다들 "어머 나 작약 좋아하는데!"라고 외친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자태로 나만한 꽃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는 듯하다. 겨울에 처음 나올 때는 5송이에 3만 원씩 하니 선뜻 선물하기 어렵지만 따뜻해지면 가격이 내려간다. 대신 오래가지 않는다. 비싸고 맛있다가 덜 비싸고 덜 달아지는 딸기처럼, 꽃도 제철이 있다. 작약은 온도에 민감한 꽃이라 잘린 상태에서는 시원한 곳이 아니면 서둘러 피고 금방 진다.
생각해 보니 내 선물 총액은 오히려 늘어난다. 상대적으로 저렴해졌을 뿐, 저렴한 꽃은 아닌데 말이다. 여기저기 선물할 곳이 많다. 방울토마토만 하던 몽우리가 배보다 커지는 작약의 마법. 이 설렘에 사람들이 유난히 더 눈이 커지면서 활짝 웃는 모습을 자꾸 보고 싶다. 꽃선물 호사를 누리기 위해 돈을 더 벌어야겠다는 결론.
작약 선물 경력이 쌓일수록 압도적인 득표율을 자랑하는 집권여당 작약이 있다. 흔한 분홍, 연한 하양이 아니다. 꽃잎의 개수를 셀 수 있는 홑작약도 아니다. 꽃잎이 겹겹이 풍성하고 붉은 겹작약이다. 빨강과 자주와 와인의 중간쯤 되는, 동양적이기도 한, 붉다는 표현이 딱 맞는 컬러다.
그중에서도 커먼트 작약은 이런 작약 처음 보았다고 동공이 확장되고 목소리 톤까지 올라간다. 다 피었을 때 꽃도 가장 크고 꽃잎 개수도 많다. 이과 출신 플로리스트는 그냥 크다는 말로 두리뭉실 설명하고 싶지 않다. '코렐 국그릇만 하다.'라고 해야 직성이 풀린다.
아쉽게도 작약만 화병에 꽂으면 왠지 덜 예뻐 보인다. 꽃다발이나 꽃바구니에서는 얼굴만 보이지만 화병에 꽂으면 줄기가 눈에 띄기 때문이다. 굵고 울퉁불퉁하다. 한 송이만 꽂을 때는 분다버그 화병에 꽂으면 완벽하다. 열 송이 이상 가득하면 줄기가 가려져서 얼굴만 보인다. 선물하기 좋은 3~5송이 정도 꽂았을 때는 줄기에 시선이 간다.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일반적으로 작고 줄기가 가는 꽃들로 덮어주는 방법을 쓴다. 마치 빨간 장미 줄기를 가리는 안개꽃처럼 말이다.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자. 사람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을 때 그 부분을 커버하느라 애쓸 수 있고, 대신 장점을 더 부각할 수도 있다. 꽃도 마찬가지다. 작약만의 화려함을 훅 끌어올려 다른 부분은 눈에 들어오지 않게 하면 어떨까? 요리 좋아하는 사람이 레시피를 바꾸듯이 나만의 노하우를 개발할 수 있어서 꽃이 좋다.
행사데코 전문 플로리스트가 호텔이나 화려해 보여야 하는 꽃장식에 자주 쓰는, 호랑이 연고 같은 만능 꽃이 있다. 커먼트 작약과 마찬가지로 파는 곳이 많지 않아서 예약해 둘 때가 종종 있다. 흔치 않은 비주얼이 낯설다가 원산지가 아프리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꽃, 글로리오사. '글로리'가 생각나는 이름이다. 라틴어로 '멋진'이라는 뜻에다, 꽃말도 영광, 화려함. 한 단에 3~4줄기가 있으니 작약 두단(열 송이)와 조합하면 세 세트가 나온다. 초대해 준 집뿐 아니라 함께 모인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물할 수 있다. 테이블에 올려놓는 순간 단순히 꽃이라기보다 호텔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온 듯하다.
뾰족한 꽃잎이 작약의 동그란 얼굴을 더 풍성해 보이게 한다. 꽃잎 사이에 여백이 많아 작약 앞에 있어도 작약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작약의 줄기가 보이지 않게 하는 마법. 어쩌면 내 눈에 거슬리는 기미 같은 단점을 고치려고 안 보이게 하려고 쿠션 덧바르듯 애쓰지 않아도 될지 모르겠다. 나만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면 남의 눈에는 그것만 보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