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이 없어서 꽃일을 오래 할 겁니다

이과생 플로리스트의 데이터 기반 곱셈 비법

by 한꽃차이

"꽃을 보면 어떻게 꽂을지 막 떠올라요?"

라고들 묻는다. 그럴 리가. 그렇다고 답하고 싶을 뿐인 나는 컴퓨터 전공자다. 감각이 탁월한 사람들은 내 눈에도 신비롭다. 디딤돌 개념수학 안 풀고도 최상위 수학을 100점 맞는 영재반 학생 같다.


유명한 플로리스트들에게 배우면 머릿속이 버벅거렸다. '들에 핀 꽃처럼', '리듬감 있게' 라고 표현하는데, 내게는 추상적으로 느껴졌다. 더 설명이 필요했다. 홀로 단계를 만들었다. 어디 어떻게 꽂아야 더 예쁘게 만들지 빠르게 파악하는 프로세스. 이걸 나만의 언어로 꽃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설명할 수 있게 되면 뛸 듯이 기뻤다. 그래서 천상 꽃선생을 하나보다.


수강생들 중에 뛰어난 분들이 있다. 내가 그토록 고민하고 연습하고 비교하며 정립한 비율을 한 번에 해낸다. 그분들에게 나는 칭찬 구체적으로 하는 꽃쌤이다. "와아 저는 이렇게 꽂는데 정말 오래 걸렸는데 감각이 대단하세요!" "헤헷 제가 좀 손재주가 있어요^^"


대신 평범한, 특히 이과 계열 수강생에게 나는 찰떡같은 꽃쌤이다. 이해가 팍 되게 숫자로 알려준다.

"흔히 황금비율이라고 하는데, 5:8 어렵잖아요? 절반보다 조금더 긴 길이로 자르시면 되요! 이 조금더는 정확히는 절반의 1/4이에요!"

5/8 = 4/8 + 1/8 = 1/2 + 1/2 x 1/4 이니까.

"이 두 꽃은 색이 가장 진해서 사진 찍으면 제일 눈에 띄어요. 대칭으로 꽂으면 이렇게 눈처럼 되요."

수강생들이 어머나 하며 웃는다.

"알면서도 꽂다보면 내가 편한 길이로 꽂게 되거든요. 그러니 두 꽃을 따로 자르지 마시고 한뼘 차이나게 동시에 자르세요. 각도는 15~60도 정도 차이나게 꽂으면 가장 무난하게 내추럴해요."

적용 전과 후를 확연히 보여주면서 이유와 해결방법까지 명확하게. "이런 설명 진짜 좋아요!"라고 하시도록.


창의력이 필요한 데코작업도 이과적 프로세스로 해낸다. 믿을 감각이 없다는 것이 성장의 비결! 예전 작품들을 보면 심히 부끄러울 만큼 비포 애프터가 극명하다. 혼자 창피하면서도 스스로가 대견하다.


의존할 무기는 오직 저장뿐. 이 한 마디가 꽃생의 좌우명이랄까. 인스타와 핀터레스트에 수천 장의 사진이 있다. '촬영' 폴더에는 방송이나 스튜디오 데코에 참고할 만한 사진을, '테이블데코' 폴더에는 테이블 장식에 유용한 사진을 모은다.


창의력이 생기는 비법은 '카테고리를 넘나들고 너무 많은 카테고리로 나누지 않기'다. 물론 '부케', '꽃다발', '꽃바구니' 같은 세부폴더도 많지만, 여기저기 쓸 범위 넓은 아이디어를 '꽃'에 넣을 때 제일 든든하다. 진주끈 장식이 있는 부케 사진도 넣어뒀다가 진주끈을 늘어뜨리기도 하고, 조화나 페이퍼플라워 장식 중에 괜찮은 부분을 생화로 연출한다. 꼭 꽃이 아니어도 컬러감만 참조하려고 넣은 사진도 많다. 이 색다른 곱셈을 거치면 내 데코는 유니크해진다.

작업이 들어오면 저장한 사진들을 둘러본다. 방송촬영이나 행사데코는 특히나 '내일모레'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 모아놓은 사진으로 평소에 1차 가공을 많이 해보아야 시간이 부족하지 않다. 나의 빅데이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이번에 쓸만한 재료, 색감, 구도, 디테일 등을 가진 사진들을 불러온다. 하나씩 살펴보고 다시 한번에 여러 사진을 보기도 한다. 지금 나오는, 싱싱한 꽃들에 적용한다. 그러면 조합도 되고 아이디어도 피어오른다. 살 꽃 목록과 예산을 적고 구도도 그린다. 쓱싹쓱싹 하얀 종이 위에 2D 연필이지만 내 눈에는 3D 컬러로 보인다.


군가는 뚝딱 해낼 만한 단계를 지난한 노력과 시간으로 결국은 해내는 나. 디딤돌 개념 수학 다 풀고 응용 거쳐야 최상위수학 풀어내는, 이런 느린 나를 애정한다. 어쩌면 척척 풀어내는 수학영재보다 문제 푸는 시간 자체를 즐기는 학생이 더 수학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그러고 보니 어떻게 꽂을지 막 떠오르기는 한다. 어마어마한 저장과 조합, 상상이라는 선행학습이 충분히 쌓여있으면! 결과 못지않게 과정을 사랑하기에, 아직 발전할 지점이 무궁무진하게 남았기에 이 일을 오래도록 꽤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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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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