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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덱시 Jun 26. 2020

직장인에게 도시락이 가지는 의미

대외적 다이어트의 도구




  세종시 본부에 근무할 적에는 국회가 자주 열렸다. 그런 날이면 새벽 1시가 되도록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야근을 하며 도대체 내가 무얼 위해 이러고 사나 싶어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아무 죄 없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어떤 늙은 공무원은 심지어 나한테 ‘아가씨가 집에 가면 뭐하냐,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집에 가고 싶어 하냐’는 망언을 하기도 했다. 때는 무려 밤 11시였다. 아니, 밤 11시면 집에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요. 결혼 안 한 아가씨면 집에서 할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은 또 어디서 나온 건지. 기발하다 기발해. 집에 있을 때 에너지가 충전되는 나 같은 사람한테는 히이이익! 소리가 절로 나는 망발이었다. 갓 임용된 신규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내적으로는 소리를 질렀다.


  집에 가면 더 바쁜 사람이거든요. 유튜브 보면서 홈트하고, 산책하고, 다음 날 사무실에 가져갈 도시락을 싸 두고, 프랑스어 공부하다 보면 금방 잘 시간이라고요, 이 영감탱이야!





  다음 날 아침으로 갈아먹을 시금치와 바나나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냉장고에 넣어 두고, 사무실에서 저녁으로 먹을 간단한 도시락을 준비하는 행위는 회사와 집만 왔다 갔다 하는 내 지루한 일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힐링이었다. 바쁜 와중에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 행하는 그런 사소한 루틴들이 나를 얼마나 보듬어 주었는지 모른다. 회사 생활을 하며 점점 나를 잃어가던 마당에, 내가 흐릿하게나마 파스텔톤 정도로라도 나의 색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 그건 다름 아닌 도시락 싸기였다.


  그거라도 안 하면 나한테 너무 미안해질 것 같았다. 눈 뜨면 출근-일-야근-퇴근. 또다시 출근-일-야근-퇴근.... 의 반복. 날 위한 행동은 어떤 것도 허락되지 않았던 때. 정사각형 락앤락에 방울토마토와 파프리카를 꾹꾹 눌러 담고 고구마를 먹기 좋도록 썰어서 담는 매일매일의 단순한 노동은 내가 나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야근이 잦아지고 내 시간이 사라질수록 도시락 싸기에 집착했다. 뭐랄까, 도시락을 싸는 시간은 하루 종일 일터에서 탈탈 털리느라 바닥난 에너지를 채우고 본연의 나로 돌아가는 절박한 의식이자 주문이었던 것이다.


  도시락의 또 다른 장점은 다이어트를 빌미로 혼자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술 먹으면 개가 된다는 소문이 돌던 사무관이랑 일하고 있었는데, 그는 야근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술 한 잔 하러 가죠 고 주무관?’하며 능구렁이 같은 말을 던지곤 했다. 그러면 나는 사무실 냉장고에서 정사각형 도시락통을 보란 듯이 꺼내오며, 아쉽지만 다이어트 중이라 못 간다고 답했다. (그리고 야근한다면서 술은 무슨 술인가) 같은 상황이 몇 번 반복되더니 나는 절대 자기랑 술 먹으러 가 줄 사람이 아니란 걸 마침내 깨달았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흐흐 나의 승리! 한 10개월쯤 같이 일했는데 단체 회식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그와 같이 술 먹으러 간 적이 없으니 내가 이긴 게 맞다. 덧붙여 단체회식 때 그가 개가 되는 장면을 실제로 몇 번 목격하고 나서는 도시락에게 더 고마워졌다.





  나는 제주로 내려오며 소속 부처를 바꿨는데, 옮긴 부처는 세종시에서 내가 몸 담았던 부처보다 훨씬 수직적이고 술잔 돌리기 같은 옛날식 회식 문화가 잔존하는 부처였다. 내가 일하게 된 곳은 소속기관이니 그런 문화가 더 심했던 건 당연하다. 기관장은 거의 뭐 1960년대 상사 스타일이어서, 직원들을 마치 회식자리 기쁨조처럼 부려먹고, 할 일도 없으면서 야근하는- 더 최악인 건 자기랑 술 먹고 밥 먹어 줄 사람 없어서 직원들까지 억지로 야근하게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틈만 나면 주말에 낚시 가자, 등산 가자. 호응이 돌아오지 않으면 사람들이 취미가 없다느니, 정이 없다느니. 낚시랑 등산 안 좋아하면 취미랑 정이 없는 건 줄 여기서 처음 알았다. 나는 거기에 놀아날 생각도, 맞춰줄 생각도 없었다. 그 정신없는 세종시에 있을 때에도 어떻게든 6시에 퇴근하려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업무시간에 일을 다 끝내는 사람이 나였다. 근데 내가 왜 일도 없는 소속기관에서 상사랑 놀아주려고 야근을 해야 하나.


    그냥 이상한 애가 되기로 했다. 야근 안 하고 상사랑 술 안 먹어주는 이상한 애.


  나는 실제로도 거의 야근을 하지 않았는데 가끔 일이 많아 진짜로 야근을 해야 할 때나 눈치 보여서 한 번씩 하는 척이라도 할 때 도시락 파워는 필수였다. 안 그러면 저녁 먹으러 가서 술친구나 해주고 있어야 할 게 뻔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도시락을 가져왔다고 하면 못마땅한 시선이 날아와 이마에 꽂혔다. 마지못해 그러라고 하면서도 얼굴은 ‘어디서 저런 애가 와서는, 쯧’이란 표정. 근데 서너 번 그런 상황을 잘 참아내면 회사 생활이 편해진다. 나만 그냥 좀 이상하고 튀는 애가 되면 더 이상 건드리지 않으니까. ‘쟨 원래 저런 애’라는 생각이 상사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이후로는 내가 야근을 안 하는 것, 회식을 자주 빠지는 것, 야근할 때 도시락을 먹는 것에 대해 굳이 뭐라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다른 직원들한테는 여전했다) 왜 저런 것들이 이상하게 보여져야 하는지 모르겠다. 일은 업무시간에 끝내고  나머지 시간에 내 삶을 살고자 하는 게 눈치를 봐야 할 정도로 나쁜 일일까.


  나는 이상한 애가 되기로 자처했지만, 나 자신이 이상한 애가 되는 것에 대해 아무렇지 않아 할 만큼 대담한 성격은 아니었다. 그게 내가 결국 공무원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일 거다. 사실 남들이 이상한 애로 생각하든 말든 무시하고 마음 편히 지내는 것이 가능했다면 평생 공무원 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내가 이상한 애로 여겨지는 것이 힘들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당연한 권리인 것이 그 조직에서는 비정상적으로 여겨지고,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특이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현실을 버텨내기에는 내가 너무 물러 터진 사람이었다.


  조직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혀버리면 여러 모로 힘든 회사 생활이 될 것이기 때문에 상사랑 술 마시기 싫으면 도시락을 준비하세요!라고 강권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상사한테 찍힐 수도 있고, 나처럼 본인이 조직에서 튀는 사람이 되는 걸 못 견딜 수도 있다. 언젠가 그만둘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상관없겠다. 하지만 승진도 하고 싶고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사람이라면 조직에 잘 어우러지는 척이라도 해야 할 테니 도시락을 싸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찌 되었건 나로서는 3년 간의 도시락 인생이 청산되어서 좋다. 도시락 싸기 말고도 내가 나일 수 있는 일들이 차고 넘치는 하루를 보내고 있으니까. 일주일에 두 번 브런치에 글을 연재하고, 주말에는 좋아하는 와인 수업을 듣기 시작했으며, 커서(?)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하나에는 정통한 사람이 되길 기대하고 있다. 도시락은? 다시는 싸지 않을 작정이다.








인스타그램 @dexy.k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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