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덱시 May 22. 2020

다름 아닌 생활의 리듬을 깨지 않는 것

Things I’ve Done After Quitting(TIDAQ)




#2. 생활의 리듬을 깨지 않는 것





   내가 출근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대열에 본격적으로 합류하면서, 요즘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생활의 리듬을 깨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일상성을 유지하는 것.

  
   사실 퇴사만 하면 없던 에너지가 넘쳐흘러 아침 일찍 벌떡벌떡 일어나, 하고 싶었던 일들을 뚝딱뚝딱 해치우는 그런 사람이 될 줄 알았다. 하하. 하지만 그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나만의 착각이었다. 나는 회사를 그만둔 지 13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침에 겨우 눈을 뜨며, 운동하기를 좋아하지만 귀찮아하고, 밤새도록 아이패드를 껴안은 채 아껴 두었던 드라마를 정주행 하고 싶고, 저녁마다 좋아하는 화이트 와인이나 마시고 싶은 그런 사람이다.


   ‘자긴 생각보다 놀고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야.’ 연이가 언젠가 나에게 했던 말이다. 너무 포인트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말이어서 뜨끔 했던 기억이 난다. ‘생각보다 좋아한다’라는 그 말은 원래 그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는 말이므로, 연이는 내가 꽤나 부지런한 사람인 줄 알았나 보다. 나 자신이 부지런해져야겠다고 판단한 상황에서는 주변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부지런해지지만(예를 들어 7급 공무원 시험 준비하던 시절), 반대로 또 나처럼 놀고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잘 없을 거다. 3년 전 그 어렵다는 국가직 7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지경.


   하지만 요즘은 갓 퇴사한 내 입장에서는 한없이 게을러지고 싶은 시기이기도 하다.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결승선이 내 앞에 놓여 있지 않은 것은 탄생 이래 처음이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참 열심히 살아왔는데 나 자신을 좀 봐줄까 싶다가도, 동시에 절대 게을러지고 싶지 않기도 하다. 


   그토록 갈망하던 나의 시간을 드라마와 늦잠으로 허비해 버리고 싶지 않으므로. 왓챠플레이에 체크해 둔 보고 싶은 드라마 리스트를 정주행 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밤 11시 전에는 잠을 청하고(이상하게도 드라마는 꼭 새벽에 보고 싶다), 더 자고 싶지만 이불속에서 나와 30분 정도 달리기를 하고 온다. 아침은 간단하게라도 꼭 챙겨 먹는다. 마치 출근을 할 사람처럼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아이패드 앞에 앉는다. 그러면 아침 9시. 뭐라도 한다. 요즘은 브런치에 연재할 글을 쓰는 데에 오전 시간을 투자하는 중. 점심시간도 여느 직장인과 똑같이 12시부터 1시로 정해두었다. 다만 직장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귀여운 요리 재료들을 키친 클로스 위에 늘어놓고 사진을 찍을 여유가 있고, 식사 시간이 무척 달게 느껴진다는 것. 오후의 시간 역시 와인 공부, 그림 그리기, 영상 편집 연습 등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들로 채워진다.


   이제 겨우 보름이 되어 가지만 다른 누군가에 의해 내 기분이 좌지우지되지 않고 평화롭게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무척이나 소중하게 느껴진다. 지금 내가 기웃거려 보고 있는 일들이 종국에 유의미하게 바뀌게 될지, 아니면 그저 시간 낭비로 끝나버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 자신이 기특하고 대견한 건 나의 ‘놀고먹기 좋아하는 본성’을 거스르고 유의미한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


   나에게 어떤 미래를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아니, 미래를 가져다줄 수는 있을까 싶은 그런 일들을 지속하기란 생각보다 어렵겠다고 깨닫는 중이다. 우선은 해 보자! 하고 호기롭게 회사 밖으로 내 몸을 내던지긴 했지만,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는 없어서 매일 같이 연이에게 묻는다. 언제쯤 내 힘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될까? 돈을 벌 수 있긴 할까? 나는 창작열에 마구 불타서 배를 쫄쫄 굶더라도 글만 쓰고 살고 싶은 예술가도 아니고, 옷도 많이 사고 싶고, 미니멀리스트도 아니고, 여행하고 싶은 곳도 많다. 그러니 돈이 필요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돈은 저절로 따라오게 되는 거라고 다들 말은 하지만 말이 쉽지. 돈이 따라올 때까지, 즉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도 않은데 좋아하는 일을 지속하는 건 정말로, 많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내가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고도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응원해 준 남편 연이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맙다.)


   나의 과거만 돌아보더라도, 내가 7급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건 열심히 하면 합격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긋지긋했지만 그래도 회사를 다닐 수 있었던 건 한 달을 버티면 어김없이 월급이 나오리라는 기대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는 ‘10km 정도 걸어가면 사과나무가 있으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가 가능했다면, 이제는 얼마나 가야 사과나무가 있을지, 사과나무가 어딘가에 있기는 할지조차 의문이 드는 상황인 거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지금처럼 하루를 열심히 보내보는 거다. 그토록 바라 왔던 선물 같은 하루하루.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미루기만 했던 좋아하는 일들로 24시간을 가득 채우고, 하루의 막바지에 오늘 하루도 계획했던 대로 바쁘게 살았네! 행복했어!라고 말할 수 있도록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을 보내보는 것. 그게 좋기도 하지만 힘들기도 할 내 앞날에 대한 예의이자 가장 큰 응원이 아닌가 싶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차곡차곡 정성스럽게 쌓인 나의 하루들이 빛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인스타그램 @dexy.koh

매거진의 이전글 퇴사 기념 타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