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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덱시 May 29. 2020

공무원이 아니어도 인생이 끝나지 않아요

공무원인 게 마치 뭐라도 되었던 것처럼

  




  직장 없는 백수가 되었지만 여느 직장인들처럼 아침 9시까지는 아이패드 앞으로 출근하려고 노력중이다. 나의 일과는 예전과 다를 바 없이 똑같은 시간에 시작되지만,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출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는 것과 나의 자유의지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는 것은 너무나도 다른 일.


  어쩌다 한 번 월요일 아침 출근을 8시 50분에 했다고 “왜 이렇게 늦게 오냐”며 비꼬듯이 한 마디 던지는 상사도 없고 (나는 지지 않고 ‘아직 9시 안됐는데요’ 하고 대꾸하는 타입이며, 그럴 때마다 상사의 어이 없다는 표정이 가관이다), 콘센트 전원도 켜지 않은 채 아침부터 프린터가 고장 났다고 속 터지게 만드는 직장 동료도 없고, 본인이 플라스틱병을 몇 번이나 다시 쓴 건 생각하지도 않고 정수기에서 이물질 나온다며 투덜거리는 사람도 없다.


  퇴직하기 바로 직전의 일터에서는 그런 일을 했었다. 내가 유일한 행정직 공무원이자, 운영지원 업무 담당이자, 서무. 그덕에 안하면 바로 티 나지만 해도 티 안나는 일들은 모두 내 차지였다. 사무실 인터넷과 프린터가 안되면 어떻게든 원인을 알아내어 해결해야만 했고(전산직 아닌데), 직원 관사가 비면 내가 살지도 않았는데 가서 청소를 하고 매트리스를 폐기 처리 해야만 했다(환경미화직도 아닌데). 나처럼 나밖에 모르는 애가 ‘지원’ 업무를 한다니. 애초에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세종시 본부에 있다가 내가 원해서 자발적으로 지방의 작은 소속기관으로 옮긴 것이었고, 나에게 부여된 업무이니 꾸역꾸역 어렵사리 하긴 했지만, 나와 맞지 않는 일 때문에 속으로는 참 많이 힘겨웠다.


  지방으로 옮기기 전, 세종시에서는 더 크다면 큰 일을 했다. 꽤 큰 국가 예산을 책임지는 사람이었으며, 법령의 개정과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의 교육에도 관여했다. 남 뒤치다꺼리도 싫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사명감에 불타 법령 개정과 지자체 공무원 교육 같은 일에 엄청난 보람을 느끼는 그런 열정적인 공무원도 아니었다. 국민을 위한 일이라지만, 그저 해야할 일이니 할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치열한 세종시 본부에서도, 비교적 여유로운 제주의 소속기관에서도 내 일의 의미를 찾지 못한 것이다.


  누군가는 배 부른 소리 한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공무원 출근 첫날부터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 이 일은 아니구나. 그 때부터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공무원을 그리 오래 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일이 많아 매일 같이 야근을 해야하는 곳에서도 그랬고, 일은 적지만 상사의 술 상대가 되어주기 위해 종종 야근 아닌 야근을 해야하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회식을 할 때마다 자신들이 공무원이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며 사무실 막내에게 공무원이 최고의 신붓감이라며 치켜 올려 주는 것도 꼴보기 싫었고, 그러면서 그들 사이에 속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는 더 화가 났다. 시간이 흐르며 내 마음 속에는 절대 저들처럼 되지 않겠어, 하는 결심과 자기혐오가 동시에 단단하게 자리 잡았던 것 같다.


  나는 울타리 안에서 원래의 내 모습을 잃고 점점 변해가고 있었다. 변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하루하루를 견디듯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이 견딜 수 없이 미웠다. 분명히 이것보다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 텐데.  매일같이 생각했다. 그러길 3년. 2020년 4월 30일을 마지막으로 나는 공무원이라는 안전한 울타리를 내 손으로 무너뜨리고야 말았다. 남들은 그 울타리 안으로 어떻게든 들어가고 싶어 안달인데, 나는 기어코 그 울타리를 박차고 나오는 선택을 한 것이다.


  울타리 밖으로 나오기 직전, 나 자신이 ‘공무원이 아닌 나’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면 어떡하나 두려웠다. 공무원이 아닌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리면 어쩌지. 별볼일 없어져서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안 봐주면 어쩌지. 참나. 공무원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공무원이라는 사실을 꽁꽁 숨기려고 했던 애가 이제는 공무원이 아닌 모습을 걱정하는 꼴이라니. 사실 나도 그 울타리 안의 사람들이랑 똑같았던 거다. 공무원인게 마치 뭐라도 되었던 것 마냥.


  그러나 그만두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공무원이 아닌 인간 고건녕은 여전히 잘 살아있고, 잘 놀러다니고, 놀랍게도 아무렇지 않다. 오히려 발목에 감겨 있던 전자 발찌를 벗은 것처럼 개운하고 홀가분 하다고 해야할까. 나도 미처 몰랐는데, 공무원이라는 타이틀이 나에게 알게 모르게 부담감을 주고 있었나 보다. ‘공무원은 이래야만 해’ 하는 재수없는 종류의 부담감. 이제는 그런 허세 가득한 부담감도 사라졌고, 공무원이 아닌 나도 여전히 사랑스럽고 소중하며, 연이(남편)와 가족들과 친구들은 나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준다. 그거면 된다. 지금 내 모습이 마음에 들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날 사랑해 주면 그걸로 되는 거다.








인스타그램 @dexy.k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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