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덱시 Jun 02. 2020

가장 안정적인 조직에서 나는 가장 불안정했다

feat. 공무원



  IMF를 직접적으로 겪지는 않았지만 그때의 국가적 상황이 얼마나 우울하고 심각했는지는 어렴풋이 안다. 코로나 사태로 많은 사람들이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무급휴직을 권장(혹은 강요) 받고, 심지어 직장을 잃기도 하는 요즘. IMF 때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 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던 2월 말에 내 30년 인생 처음으로 나라가 망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사회적 불안.


  구체적인 사례는 어디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내 친구 중 한 명은 의료기기 업계에 종사하는데, 근 세 달간 예정되어 있던 병원의 수술들이 전부 취소되고 그 여파로 회사의 매출이 급감하여 한 달에 15일만 출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월급은 당연히 반토막. 3년 전 LG를 나와 조종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미국에서 힘들게 공부하고 최근에 돌아온 또 다른 친구는, 항공사 채용계획이 감감무소식이라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다. 나는 부모님께서 제주에서 작년부터 작게나마 운영하고 계시던 에어비앤비를 돕고 있었는데, 오픈 이후 항상 예약이 풀로 차다가 코로나가 심각해지던 3월부터는 예약률이 80% 이상 떨어졌다. 에어비앤비로 운영하던 원룸들이 시장에 무더기 매물로 나왔다는 뉴스는 먼 이야기가 아니었다. 관광으로 먹고사는 제주도 같은 관광지의 자영업자들이 얼마나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을지 나 같은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 하겠지.


 이런 와중에 공무원을 그만두었다. 때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이던 4월 말. 그 힘들던 IMF 때도 월급이 깎여본 적이 없다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월급 깎일까 노심초사 걱정 없이 다닐 수 있는 직장이 어디 흔한 줄 아느냐며 상사에게 참 많이도 퇴사를 만류당했다. 나도 안다. ‘경제적’ 안정감의 측면에서 공무원을 이길 직종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 말이다. 큰 액수가 아니라도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이 소중하다는 사실도. 불과 한 달 전 나의 상사였던 사람이 비유하기로는, 공무원이란 직업은 튼튼한 집과 같아서 밖에서 태풍이 불든, 번개가 치든, 폭설이 내리든, 집 안에서 아무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기만 하면 된단다. 이 사실이 도리어 나를 숨 막히게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너질 염려가 없는 집에서 내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면 무슨 소용일까.



안정적인 직업에서의 안정은 경제적 안정

  며칠 전 25일은 내 월급날이었다. 그렇게 큰돈은 아니었지만 한 달에 한 번 어김없이 들어오던 돈이 들어오지 않으니까 내가 이제 무직이라는 사실이 뼈를 때렸다. 당장 내 월급 통장에서 자동이체되던 우리의 한 달 생활비, 내 용돈, 적금 50만 원 등이 위기에 처했다. 매 달 꼬박꼬박 들어오던 200만 원이 통째로 증발해버리니 눈 앞이 캄캄할 수밖에. 부담 없이 즐기던 외식, 한 달에 한 번은 꼭 하던 인터넷 쇼핑 등 지금까지 누려 왔던 것들을 포기할 생각을 하니 갑자기 나 자신이 좀 처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원래 무분별하게 소비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행복감을 느끼는 일정한 소비 수준이 있었는데 그 수준이 충족되지 않으면 내 생활에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 뭐 이런저런 걱정이 들었다. 앞으로 프리랜서로 살기 위해서는 이런 불안한 상황과 기분에 익숙해져야 하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그렇다. 이제 경제적 안정감은 내 삶에서 당분간 자취를 감춘 것이다.


경제적 안정만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내 마음이 편해야지

  직장에 다니면 상대는 별 의미 없이 툭 던진 말인데, 그 한 마디 때문에 하루 종일 마음이 힘든 경우가 많다. 의도가 있는 경우는 더더욱. 사실 내 마음이 강해서 휘둘리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나는 좀 많이 힘들어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누구에게 뒷담화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는 답답한 스타일. 그러면서도 내가 이 따위 것 때문에 내 하루를 망치다니 정말 바보 같다... 자책하며 나 자신을 탓하는 존재. 그러다가 잊고, 또 아파하고. 내가 경험한 직장 생활은 이 굴레의 반복이었다. 상처가 났던 자리에 딱딱한 딱지가 생겨 무뎌지면 좋으련만 3년을 해도 무뎌지지 않더라.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대로 받고, 같잖은 방어 기제 때문에 성격은 점점 더러워져 간다. 그러다가 이게 과연 사람들이 말하는 ‘안정’이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이렇게 힘든데, 누군가의 의미 없는 한 마디에 하루의 기분이 왔다 갔다 하는데. 이런 게 안정인 건가. 철밥통이라고 불리는, 가장 안정적인 공무원 조직에서 나는 가장 불안정했다.


  그래서 기를 쓰고 나와야만 했다. 코로나도 걸림돌이 될 수는 없었다. 앞으로 어딘가에 취업하려는 생각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공무원은 월급 깎일 일 없는 안전한 직종이라는 사실도 나에겐 큰 메리트가 없었음은 당연하다.

  퇴사 후의 시나리오는 다행히도(?) 예상한 대로다. 한 달에 벌던 돈 200만 원이 한순간 없어져 버린 것도, 그 덕분에 내가 누리던 좋고 맛있고 예쁜 것들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것도, 예전보다 심플하게 살기 위해 마음을 고쳐먹기 시작한 것도, 누군가의 공허한 한 마디에 휘둘릴 일 없이 잔잔한 심적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것도. 마지막 한 가지만으로도 나의 퇴사는 잘한 일이다. 내 정신과 마음 상태가 오로지 나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위안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큰 힘을 가졌다. 기분이 좋아도 내 탓, 나빠도 내 탓. 좋든, 나쁘든 모든 것이 내 책임 아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킬 때마다 세상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 단단해 짐을 느낀다. 인생의 대부분을 담보로 잡힌 채 평생 고민만 하며 불행하게 흔들릴 것이냐, 아니면 경제적 안정을 조금 내려놓고 인생의 주인으로 설 것이냐. 나는 당연히 후자다.



덧. 직장인 분들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뜻이 아님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직장을 다니든, 자영업을 하든, 예술을 하든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을 동경하며 존경합니다. 제 동료들 중에도 멋진 공무원분들이 많았어요. 공무원으로서 했던 일을 사랑할 수만 있었다면 저도 이렇게 그만두고 나오지는 않았겠지요! 적어도 저라는 사람은 그 안에서 불행했기에, 제 스스로 좀 더 강해지기 위한 선택을 한 것이랍니다:)







인스타그램 @dexy.koh

매거진의 이전글 공무원이 아니어도 인생이 끝나지 않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