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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덱시 Jun 05. 2020

실수처럼 보이는 게 마음에 들었어

Things I’ve Done After Quitting(TIDAQ)





#3. 프란시스 하


  솔직히 고백한다. 나는 ‘프란시스 하’라는 영화를 처음으로 봤을 때 아주 푹 잘 잤다. 누워서 보던 침대가 너무 포근했다고, 마침 어둑어둑 해가 지던 시간이어서 잠들기 딱 좋은 분위기였다고 우겨보지만, 어쨌든 당시에는 심플하게 영화가 재미없어서 잠든 게 맞다. 흑백 영화인 데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큰 영화적 사건이 전혀 없이 프란시스의 일상이 흘러가기 때문에 잠들 만도 했다(고 또 합리화).


  퇴사 후, 다시 이 영화를 본 건 미처 마치지 못한 영화를 끝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푹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비로소 프란시스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었을까.


  자유로운 예술가로 살고 싶다고 투정만 부리고 그렇게 사는 이들을 동경만 했지, 그들의 실제 삶이 어떨지는 감히 상상조차 못 하던 애송이 시절. 상상은커녕 나는 그들과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었다. 출근해서 적당히 일하면 적당한 월급이 때에 맞춰 계좌로 들어오니 그에 맞춰 적당히 살고 생활비 걱정 같은 건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삶이었다. 그러다가 프란시스보다 네 살 더 늙은 서른한 살에 프란시스의 처지가 된 거다.


  그레타 거윅이 연기한 프란시스는 얼마나 찌질한지. 줏대 없어 보이는 말투, 데이트를 하다가 카드가 거절당했는데, 데이트 상대에게 좀 사 달라고 하면 될 것이지 그걸 못해서 ATM을 찾아 동네방네 뛰어다니는 모습, 현금인출 수수료 3달러에 주저하고, 자기 팔에 피가 나는 것도 모르는 둔한 모습, 집 렌트비 낼 돈도 없어서 전전긍긍. 남자친구 생긴 베스트 프렌드에게 ‘걔 진짜로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 않냐’며 엄마 뺏긴 애처럼 질투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철없는 애 같아서 진심으로 뺨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 F: 우린 세계를 접수할 거야
  - S: 넌 출판계에서 먹어주는 거물이 되고
  - F: 넌 완전 유명한 현대무용수가 되고, 난 너에 대한 비싼 책을 낼 거야
  - S: 우리가 씹던 걔들도 관상용으로 한 권씩 사겠지
  - F: 그리고 같이 파리에 별장을 사는 거야


  무용수가 꿈인 프란시스와 출판업계에서 일하는 친구 소피가 인생이 힘들 때마다 둘이서 함께 외우는 주문 같은 것이자 귀여운 몽상. 어이없지만, 나도 가끔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말도 안 되는 질투를 느끼고 그 같은 작가가 되어 해외에 체류하며 글을 쓰며 사는 삶을 꿈꾼다. 그러나 나에게도, 프란시스에게도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프란시스는 무용단에 들어가지 못하고 견습생 신분을 전전하며 발레강사, 기숙사 조교 등 온갖 아르바이트에 치여 살면서도 무용단 사무직 제안은 기어코 거절한다. 같이 살자던 남자친구의 제안을 밀어내고부터는 일도 잘 안 풀려 살 집을 구하는데도 애를 먹고, 렌트비 내는 것도 힘들다. 사람들은 27살인 그녀에게 나이가 많다며 농담 같은 진담을 건네질 않나. (이쯤에선 내 나이를 의식해서인지 과한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영화는 프란시스가 어떤 과정을 거쳐 안무감독으로 훌륭하게 데뷔하게 되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그녀의 찌질한 일상이 잔잔하게 흑백 브이로그처럼 흘러가다가, 종국에 안무감독이 되어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그녀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여준다. ‘가까이서’라고 쓰는 이유는 영화의 후반부에 프란시스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장면이 유난히 많기 때문이다. 클로즈업되어 엷게 미소 짓는 프란시스의 얼굴은 예전에 비해 한결 편안하고 성숙해 보이지만, 어쩐지 조금 슬프다. 무용수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 대한 여운일까. 현실과 타협해야 했지만, 무용수 대신 방향을 조금 틀어 안무감독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프란시스는 내 눈에 여전히 빛났다.


  데뷔 무대가 끝나고 친구와 공연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프란시스가 말한다.


  - F: I liked things that looked like mistakes. 실수처럼 보이는 게 마음에 들었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프란시스가 너무 긴 자기의 이름(Francis Halladay)을 망설임 없이 접어서 프란시스 하(Francis Ha)가 된 상태로 우편함에 끼우는데, 그 마지막 장면과 함께 프란시스라는 사람을 관통하는 대사라고 생각했다. 불완전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도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가짐.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말.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괜찮고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때에 따라선 현실과 타협할 수도 있는 거고 조금 구부러 져도 괜찮다. 가장 중요한 건, 그래도 빛날 수 있다는 거다.




인스타그램 @dexy.k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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