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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덱시 Jun 12. 2020

아내의 퇴사를 대하는 남편의 자세

안 괜찮아져도 괜찮아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회사에서 힘든 하루를 보내고 와 저녁 내내 기분이 바닥을 치던 날이었다. 회식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옷과 머리카락에서 고기 냄새가 풀풀 풍기는데도 샤워는 하기 싫고 그냥 널브러져 손바닥만 한 핸드폰 화면이나 아무 생각 없이 들여다보고 싶은 날. 자려고 침대에 몸을 누이면서 드는 생각은 ‘내일 출근하기 싫다’뿐이었다. 나쁜 생각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남들은 다 참고 다니는데 나는 왜 이렇게 참는 게 힘들까. 다들 적당히 욕하면서도 잘만 사는데.. 나한테 문제가 있나. 못 견디고 힘들어하는 내가 사회 부적응자일까. 버티면.. 괜찮아지긴 하는 걸까. 연이랑 침대에 나란히 누워 마음속으로 자책을 하다가 급기야 눈물이 흘렀다.


  - 나: 연아, 난 왜 괜찮아지지 않을까
  - 연이: (토닥토닥하며) 괜찮아, 안 괜찮아져도 돼


  한참을 연이 품에 안겨 울다가 스르르 잠들었던 것 같다. 잠들기 전까지 괜찮아지지 않아도 된다는 그 말이 참 고맙다고 생각하면서 자꾸 되뇌었다.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버티다 버티다 더 이상 버티기도 힘들어 나 자신을 책망하게 되는 순간.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고, 못 견디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 있던 나에게 나의 남편 연이는 조금만 버텨보라고, 다 괜찮아질 거라고 하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건넨 말은 도리어 괜찮아지지 않아도 괜찮다,였다. 그 한 마디가 그때의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그는 아마 모를 거다.


 - 괜찮지 않으면 뭐 어때, 그건 네 탓이 아니야. 괜찮아지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돼.


  내가 회사 생활에 맞지 않는 게 마치 내 잘못처럼 느껴져 힘겨울 때가 종종 있었는데, 울고 있는 나에게 그가 해 준 말은, 결코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내가 공무원을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연이는 단 한 번도 망설이는 기색 없이 내가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대수로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나에 대한 끝없는 믿음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쿨함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어떤 남편이 아내가 7급 공무원을 때려치우겠다는데 선뜻 그러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는 그만두려면 빨리 그만두고 뭐든 하고 싶은 일을 당장이라도 시작해 보라며 나를 부추겼다. 연이가 나의 퇴사에 그토록 쿨했던 덕분에 난 33살에 하려고 했던 퇴사를 2년이나 앞당겼으며, 그의 믿음에 부응하기 위해 글 쓰는 것을 포함해 이것저것 많은 시도를 해보는 중이다.


  사실 연이는 본인의 행복보다 나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것 같다고, 나의 행복이 있어야 자기도 행복할 수 있으니, 자길 위해 나에게 행복한 삶을 살아달라고 말해 주는 사람. 나도 그와 같은 마음이라 쌍방의 아름다운 사랑이 완성된다면 정말 좋겠지만 슬프게도.. 기본적으로 이타적인 성정을 타고난 그와는 다르게,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이 제일 애틋한 사람이다. (미안합니다..) 연이는 그 사실을 이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에게 왔고, 나는 그런 그를 만난 걸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묵묵히 지켜보고 뒤에서 열심히 응원해 줄 거야. 온 우주에 단 한 명만 네 편이라고 하면 그건 분명 나일 거야. 항상 당신을 믿고 언제나처럼 있을 테니까 조급해하지도, 걱정하지도 말고 너의 속도로 묵묵하게 너의 길을 걸어갔으면 해.’


  퇴사하던 날 연이는 이런 말을 편지에 적어 나에게 주었다. 펑펑 울었다. 다만, 내가 펑펑 운 이유가 이토록 믿음과 사랑이 가득 차다 못해 넘치는 편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퇴사를 결정한 순간부터 연이가 매 달 20만 원씩 7개월 동안 저축하고 용돈 10만 원까지 얹어서 마련했다는 퇴직금 150만 원 때문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ㅎㅎ).



 “나는 복숭아 알러지를 가진 채 복숭아 과수원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불행한 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무작정 뛰쳐나오라는 얘기가 아니다. 회사만 때려치우고 나오면 어떻게든 될 거라는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알려주고 싶을 뿐이다. 세상에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길이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그 다양한 길들을 두루 살펴본 뒤에 어떤 선택을 내리든, 결코 당신 자신을 미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 서메리,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


  연이가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도 이런 게 아니었을까. 나의 남편 연이의 한 마디가, 서메리 작가님의 글이, 자책의 늪에 빠져 힘들어하던 나에게 큰 힘이 되었던 것처럼, 누군가 같은 이유로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멀리서나마 꼭 전하고 싶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요.


  




인스타그램 @dexy.k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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