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는 국뽕은 구다라나이
일본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라는 단어를 자주 접하게 됩니다. 누군가 불필요한 걱정을 하거나, 행동이나 생각이 허접한 경우, 재미도 없고 맥락도 없는 허무개그를 날리면 옆에서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라고도 합니다.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는 ‘아무 데도 쓸모가 없다(取るに足らない)’ ‘형편없다(ばかげた)’ ‘말도 안 돼(話にならない)’ ‘무의미다(無意義な)’ ‘가치가 없다(価値の無い)’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한자로 쓰지 않고 히라가나로만 쓰는 이 단어의 유래에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일본의 술(お酒)과 관련된 설입니다.
에도시대(江戸時代·1903-1868), 행정의 중심지는 쇼군이 있는 도쿄(東京·옛 이름은 江戸)였지만, 여전히 텐노(天皇)가 사는 교토(京都)와 상업의 도시 오사카는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지금이야 도쿄로 상경한다고 하지만 당시에는 도쿄에서 교토로 상경, 교토에서 도쿄로 하경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왕이 있는 곳이 수도였던 거죠. 그래서 명치유신을 일으킨 혁명세력이 가장 먼저 한 일이 텐노를 도쿄로 옮겨오는 일이었습니다.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 유래로 거론되는 에피소드 중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18세기, 교토 후시미(伏見)에는 풍미와 맛으로 유명한 일본 술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유명세는 전국적으로 확산하면서 도쿄까지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역사가 짧은 도쿄에서는 그런 깊은 맛을 내는 술을 제조하기 어려웠던 거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래서 맛없는 술을 마시면 ‘아 교토에서 내려온 술이 아니구나’ 즉, ‘구닷테킷테이나이(下って来ていない)’ 술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때 사용한 단어가 구다루(下る)로 거기에 부정조동사 나이(ない)가 붙어 결국,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는 교토의 술이 아니니 형편없다는 말이 생겨났다는 설입니다. 그러나 이는 일부의 주장에 불과한 가설입니다.
그 외에 구다루(下る)에는 ‘이야기의 맥락이 잘 맞는다’라는 의미도 있으니 부정문은 ‘이야기의 맥락이 맞지 않는다’, 그러니 ‘형편없다’라는 말로 이어졌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단어에는 보다 잘 알려진 흥미로운 설이 있습니다. 바로 백제의 문물처럼 세련되지 못하다, 백제의 것이 아니니 명품이 아니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입니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일본이 백제를 ‘구다라(くだら·百済)’라고 부르는 것에 기인합니다. 백제(百済)를 일본식으로 발음하면 ‘하쿠사이’가 됩니다. 일본의 고대 문헌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백제(百済)를 ‘구다라’로 부르는 근거를 찾지 못한 일부 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당시 백제에서 온 사람들에게 일본인들이 ‘당신은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외지인들은 ‘큰 나라(大国)에서 왔다’고 대답했고 이 ‘큰 나라(クンナラ)’가 ‘구다라(くだら)’가 되었다는 겁니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 주장이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는 ‘구다라(くだら·백제)’에 일본어의 부정문 ‘나이(ない)’가 더해져 ‘백제의 것이 아니다’ ‘백제의 것이 아니니 형편없다’라는 의미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 설이 다수학자들이 주장하고 일본학계도 인정하는 설명이지요.
7세기경 수당을 비롯한 백제, 고구려, 신라 등과 활발한 해상교류를 이어가던 오사카항, 가와치호(河内湖) 일대 주변을 나니와츠(難波津), 츠노쿠니(津の國) 등으로 불렀습니다. 최근 한국의 드라마·영화·가요 등이 전 세계적으로 뜨거운 반향을 일으키고 있지만, 고대 일본에서 백제의 물건은 지금의 K-POP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인기가 높았습니다.
청동기시대를 거치지 않고 석기시대를 살던 일본에 철기와 불교, 한자를 전해준 나라가 백제를 비롯한 고구려, 신라였던 거죠. 아시는 것처럼 백제하고는 아주 활발한 교류를 했는데 백제는 문명을, 일본은 군사를 제공하는 윈윈 관계를 유지했다고 하는군요. 군사를 파견해준 일본에게 백제는 일본 최초의 사찰 아스카지(飛鳥寺) 공사에 승려 6명과 조사공(造寺工), 와박사(瓦博士), 화사(畵師) 등 6명의 전문가를 파견했다는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험한 바다를 건너 온 사람들을 일본에서는 도라이진(도래인·渡来人)이라고 불렀고, 그들은 문명국에서 온 귀한 사람들로 대접받았습니다.
고대 일본인들이 백제를 얼마나 선호했는지를 보여주는 유물, 유적, 문헌 기록 등이 일본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대륙과 잦은 왕래를 하던 오사카 지역의 일부를 ‘구다라 코오리(百濟郡·くだらのこおり), 나라 중심을 흐르는 하천은 ‘백제천’, 639년 죠메이 텐노(天皇)가 지은 절은 ‘백제대사’, 그가 거주한 궁의 이름을 ‘백제대궁’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고대 일본의 의상 역시 백제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의 구다라는 곧 백제(百濟)라는 주장이 생겨나게 된 겁니다. 패전 후 좀 의식 있는 학자, 선생들은 거의 이 주장을 기정사실로 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추론이니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의 구다라=백제(百濟)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일본에게 문명을 전파했다고 해서 우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또한 중국에서 전해진 문명을 전해준 것뿐입니다. 14세기 중국 원나라 장시성의 경덕진가마에서 탄생한 청화백자는 중동과 서양상인들 교역선에 실려 전세계로 퍼져났고 중국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청화백자의 파란 안료, 회회청(回回靑)은 아라비아에서 수입한 것이며 도자기에 새겨진 포도문양은 그리스에서 온 겁니다.
지금은 문명과 문화가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퍼지지만, 고대문명은 바닷길을 타고 물처럼 돌고 돌았습니다.
물이 돌고 도는 동안 수많은 사람의 손길이 닿아 다양한 성분을 품게 되는 것처럼 문명 또한 머문 곳의 문화를 만나 각른 다른 모양, 다른 색의 꽃을 피웁니다. 서로 다른 모습의 꽃들이야말로 그 나라의, 그 사람의 독창성입니다.
배추나 무 등 야채를 소금에 절인 야채는 아시아 및 동유럽 국가에서 일반적인 반찬입니다.피클은 소금에 식초, 설탕 및 향신료를 사용합니다. 소금에 절인 배추에 고추가루 등 각종 양념으로 김치로 완성한 것이 우리문화의 독특성입니다. 일본은 무, 배추에 그치지 않고 가지, 각종 야채를 소금, 엿기름, 미소 등에 절여 쯔게 모노로 탄생시켰으니 뭐든 파오차이가 원조라고 주장하는 원조 논쟁이야말로 정말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