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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을 상실한 시대, 욕망을 의리로 포장하지 마라

by 최유경

최근, 인터넷이나 뉴스에서 쏟아져나오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련의 뉴스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들의 수치심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수치심은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체면과 부끄러움을 아는, 즉 염치(廉恥)를 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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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에서 서양은 죄의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일본은 ‘수치’를 기반으로 성립된 문화(恥の文化と罪の文化)라고 단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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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도덕심, 윤리의식의 기반을 ‘수치’, ‘부끄러움’에 두는 건 비단 일본에 국한된 건 아닙니다. 일찍이 공자는 “학문을 즐기는 것은 지혜에 가까워지는 것이며, 수치를 아는 것은 용기에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맹자도 “부끄러운 마음이 없음을 부끄러워할 줄 안다면 부끄러워할 일이 없다(無恥之恥 無恥矣)”고 했습니다. 순자는 “염치를 모르는 사람은 음식만 축내는 사람(無廉恥而嗜乎飮食)”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공자의 말씀을 본받으려 애썼던 우리나라 선비들도 부끄러움을 삶의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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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에서 부끄러움은 ‘하지(恥,はじ)’라고 하는데,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는 의미로 ‘하지오시레(恥を知れ)’라고 합니다. 베네딕트는 서구인들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전지전능한 신이 언제나 나를 보고 있다는 두려움으로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의식을 하고 있지만, 일본인들은 타인이 보기에 부끄러운 행동인지 아닌지를 그 무엇보다 중요시한다고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일본 사회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 본 거죠.



타인에 의한 평가가 자신을 부끄럽지 않은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겁니다. 하지만 베네딕트는 그렇지 않다고 본 거죠. 일본의 ‘부끄러움의 문화(恥の文化)’는 일본이 도덕적으로 우월함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일본의 집단주의 문화가 수치심 문화를 만들었고 일종의 강요된 수치심이 자신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도록 한다는 걸 말하려 한 겁니다. 서구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가미카제 특공대처럼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무모한 죽음을 선택하는 일본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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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은 아이들에게 은혜(恩)를 입고도 이를 갚지 않는 것, 의리(義理)를 지키지 않는 것, 그로 인해 남에게 비웃음(嘲笑)을 사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의 수치(恥)심은 무사 문화에서 나온 걸 겁니다. 가마쿠라 막부 이후 배신이 난무한 무사들의 세계에서 배신하지 않고 의리를 지키는 게 도덕이라는 가치관은 유교의 효나 충보다 스스로의 조직을 지키는 중요한 덕목이 되었을 테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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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군을 위해 죽지 않는 부하,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 무사는 부끄러움의 상징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태평양전쟁 당시 전쟁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전쟁에 나가지 않는 건 비국민이요, 그야말로 수치스러운 행동으로 마을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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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하지(恥,はじ)’가 은혜나 의리가 나쁜 일에 함께 가담하지 않는 사람을 비난할 때도 사용된다는 겁니다. 내가 너를 이 자리까지 오게 했는데, 너만 살려고 발 빼냐, 뭐 그런 의리는 어둠의 세계에서나 통하는 거겠죠, 돈독한 사이라고 나쁜 일을 함께해야 하는 의리는 어디에도 없을 테니 말이죠.



수치와 혐오는 극도의 개인감정으로, 공자가 말하는 부끄러움, 수치심은 베네딕트의 지적처럼 타인의 눈을 통한 평가도, 절대적 존재를 향한 죄의식에서 발현된 것은 아닙니다. 부끄러운 행동에 대한 평가는 스스로의 도덕성에 따른 겁니다. 그러니 역으로 그가 무엇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것으로 그의 윤리의식을 알 수 있는 거겠죠.



수치심, 부끄러움이라는 말이 지금처럼 절절히 와 닿은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수치의 ‘치(恥)’는 ‘귀 이(耳)’와 ‘마음 심(心)’으로 이루어진 글자로 수치심을 느끼면 귀가 빨개진다는 의미인데, 요즘의 한국의 사태를 보고 있노라면 일을 저지른 쪽이 아니라 보는 쪽이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수치심은 죄책감과는 다른 마음입니다. 수치심은 오직 인간만이 부끄러움을 안다고 알려졌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자는 무리에 피해를 주면 부끄러움을 느끼고는 떠난다고 합니다. 하물며 인간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해서야 어디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부끄러움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라는데, 지금 우리 사회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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