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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해 Dec 18. 2021

누가 앵무새를 죽이는가?

<앵무새 죽이기>

앵무새 죽이기

좋은 책이라고... 성경 다음으로 미국에서 많이 읽힌 책이라는 타이틀 자체가 나에겐 부담이어서 미루고 안 보고 있던 책을 보게 되었다.

사전 정보 전혀 없이 나는 그냥 추리소설인가 했다. 누구누구 죽이기여서.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놀랬다.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었으면 진즉에 보는 건데...

그렇다 책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인종차별이다. 그것에 대한 아버지의 정의 실현. 아이들의 편견 없는 맑은 시선. 마을 사람들의 부조리 등등...

내가 알아보지 않아도 남들이 다 찬양해줄 만한 훌륭한 내용인 건 틀림없다. 나까지 이것에 대해 찬양하기엔 나는 인종차별에 대한 식견이 충분치 않다.

나는 내가 보이는 것만큼만.

나는 편부가정이 눈에 보였다. 흔히들 편모가정 편부가정이라면 갖게 되는 선입견들. 그러나 이 책의 스카웃이 자란 가정은 엄마가 없는 편부가정이기는 하나 아이가 결핍을 느낄 엄마의 자리가 전혀 아이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다. 아빠가 엄마 몫까지 하는 이상적인 아빠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빠는 물론 변호사로 사회적 지위도 갖고 있는 가정에서는 부드럽고 적당히 엄격한 완벽한 아빠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것이 엄마의 역할을 대신하진 않는다. 오히려 흑인 가정부 아줌마, 동네에 케이크를 구워주는 할머니, 잔소리 쟁이이기는 하나 어떤 면에서는 엄마의 악역을 맡아주는 고모, 친한 친구, 잘 놀아주는 오빠, 거기에 적당히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웃아저씨가 스카웃을 천진할 수 있는 말괄량이로 키우고 있다. 

만약 스카웃에게 '이상한 엄마'가 있었다면 스카웃은 지금처럼 정의와 불의를 정확히 판단하며 맑은 가치관을 가진 아이로 클 수 있었을까? 아닐 경우가 많다는 걸 나는 요새 내 주위에서 스쳐가는 아이들을 통해 탄감한다. 아이가 식당에서 뛰어다녀도 나무라는 식당직원을 나무라는 엄마들, 아이들끼리의 싸움에 끼어들어 사건으로 확대시키는 엄마들, 이상한 엄마들 그룹을 만들어가며 아이들 앞에서 왕따를 시연하는 엄마들...

때로는 덜하는 것이 지나치게 하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아이에게 지나치게 잘하려다 벌어지는 일들이 요사이 왕왕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냥 밥을 챙겨주고 옷을 챙겨주고 바라봐 주고 하는 것만으로도 엄마의 역할이 다일수 있는데 거기에 공부도 더 시켜주고 싶어서 그놈의 정보를 향해 필요 이상으로 바쁜 엄마들, 아이 대신 싸워주는 엄마들, 아이 대신 살아주지 못하는 나머지 인생에 안달 난 엄마들을 보고 있노라면... 가끔 그러기 전에 아이 인생에서 사라져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를 남몰래 상상해보기도 한다. 

좀 모자라도 괜잖아라는 듯 위로를 전하는 이 책은. 

모든 과잉의 시대에 살아가는 내게 결핍의 시대가 들려주는 따뜻한 동화로 기억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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