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단 하나뿐인 고양이
나는 아직 녀석에 대한 탐색을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 녀석은 우리 집 욕실에 대한 탐색은 물론 나에 대한 탐색도 이미 끝낸 것 같았다. 나는 늘 이것이 문제였다. 나의 속내를 남에게 너무 쉽게 들켜버린다는 것. 그래서 번번이 낭패를 보면서도 이것은 노력한다고 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얘는 뭐지?’ 녀석의 당당함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내가 아는 보통의 고양이는 이러지 않는데?... ’
나는 내 앞의 생명체가 고양이가 맞기는 한 건지 콧물을 줄줄 흘리며 재차 확인했다. 외모는 빼박 고양이상 얼굴에, 등에 검은 점이 넓게 찍혀있는 삵과의 고양이 종인 것으로 사료된다. 가끔 치켜드는 꼬리의 길이로 보나 아무한테나 사정없이 방정맞게 흔들어 대지 않는 걸로 봐선 일단, 개는 아닌 게 분명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밀당의 최강자인 고양이님께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남의 집을 밀땅도 없이 따라오는 것으로 봐선- 아니, 엄밀히 말해 이건 따라온 게 아니라 흡사 습격에 가깝다.- 예사 고양이는 아닌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다 재채기가 연거푸 나는 바람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 녀석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이름은커녕 길고양이 인지 아니면 누구네 집 잃어버린 고양인지. 녀석의 깨끗한 상태로 보아선 집을 잠깐 나온 고양이 같기도 하고 큰 점 위에 희긋한 먼지가 내려앉은 걸로 봐선 길고양이 같기도 한... 다시 말해 결론은 녀석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이 아인 종잡을 수가 없다. 눈물이 고였다. 재채기와 함께 코가 발작하듯 가렵더니 이제는 슬슬 얼굴 전체가 가려워 오기 시작했다.
잠시 휴전을 나혼자 선언하고 알레르기 약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간질간질하던 코가 잠깐이나마 진정되는 것 같았다. 분리수거를 위해 들고 들어온 아까 따놓은 싸지 않은 참치캔이 신발장 위에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약장에서 약을 찾아 챙겨 먹고,
싸지 않은 참치캔을 다시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알현하듯 그것을 고양이에게 내밀었다. 여지없이 까였다. 이제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적어도 이 녀석은 배가 고파서는 아닌 거였다. 애초에 나한테 접근한 이유가... 그리고 지금까지 약 30분간의 행적으로 보아 나를 1,3,5,7,9로 띄엄띄엄 보고 있음은 확실했다. 굳이 안 된다는 나의 의견을 무시하고 우리 집에 쳐들어 온 걸로 보나 나의 홈그라운드에 와서 나보다 먼저 긴장을 놔버린 걸로 보나...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이 나를 무시하는 게 아니고 뭐란 말인가...
이제 완전히 긴장을 풀어재낀 녀석은 한두 번 눈곱을 때는 동작을 하더니 이내 배를 바닥에 깔았던 자세를 고쳐 잡고 몸을 세모낳게 고추세워서 본격적으로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욕실의 어떤 지점이 녀석의 세면 욕을 자극했을까? 여기가 욕실인걸 본능적으로 아는 걸까? 비누냄새가 났던 걸까? 녀석은 손을 곱아 얼굴을 비벼가며 오랜 시간 혀로 공들여 세수를 했다. 그리고는 이젠 배를 벌렁 까고 배에 난 털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숱이 많은 털이 덮여있는 곳을 유심히 보며 성별을 알아내려는 나의 눈길을 알아챈 걸까? 순간 배를 확 오므려 버린다. 그 통에 나는 결국 그것의 성별을 알아내지 못했다. 언 듯 보기는 뭔가 불룩한 것도 같고 수놈 치고는 그곳의 북룩함이 충분하지 않은 것도 같았다. 이번에도 녀석의 정체를 밝히는 건 글렀다. 녀석은 온몸의 구석구석을 아주 정성스럽게 닦았다. 이지점에서 길고양이인지 아닌지 나를 헛갈릴게 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녀석은 깔끔쟁이 길고양이였거다. 나처럼 어제 저녁 무슨이유인지는 모르나 몸단장의 사간을 놓친.
녀석은 오래도록 그렇게 단장을 했다.
그나저나 나도 샤워를 해야 했다. 어제저녁 장시간 운전을 하고 돌아다닌 탓에 화장만 겨우 지우고 자느라 샤워는 아침으로 미뤘었다. 녀석이 열심히 몸을 비벼 준 덕에 아까부터 다리에서 스멀스멀 뭔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 나기 시작하기도 했다. 샤워가 시급했다.
아무리 고양이기는 하나 오늘 처음 본 사이에 옷을 훌러 훌렁 벗을 만큼 나는 숫기가 있는 편이 아니었다. 한낱 고양이 앞에서 옷을 벗어 말어를 고민하는 이 웃픈 상황이 막상 닥치니 진지해졌다. 마치 첫날밤을 치르기 전 새신랑 앞의 새색시마냥 부끄러움마저 들었다. 나와 교감이 되는지 마는지 구분이 안 가는 저 녀석에게 이쪽을 보지 말라고 당부의 텔레파시를 보내도 소용없을 것이었다.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을 만큼 찝찝함의 수위가 올라 찼다. 창피고 뭐고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하나하나 탈의하기 시작했다. 세수를 마친 녀석은 내가 옷을 벗느라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깐 내 쪽을 바라보고는 내 볼 것 없는 몸매를 한번 쓱 보더니 못 볼 것을 본 거 마냥 흠칫 이내 고개를 돌려 버린다. 고양이에게 조차 어필이 안 되는 몸매인 것이다 내 몸매는. 아까의 오랜 망설임과 부끄러움이 뻘쭘해지는 순간이었다.
감히 내 몸매를 무시한 이놈을 어떤 식으로든 응징해야 했다. 고양이들의 취약점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물... 음흉한 미소를 띠며 샤워를 하다 놈을 괴롭힐 요량으로 젓은 손을 튕겨 놈에게 물을 튀겼다. 어쭈구리 장난인 줄 안다 이 녀석은. 조금 더 적셔 제법 굵은 물방울을 놈에게 튀겨도 여간해서 기분 상해하는 기색이 없다. 내가 지랑 놀아주는 줄 안다. 내 작전은 무참히 실패했다. 어느새 나는 놈의 계략에 말려들어 녀석과 한참을 그렇게 물놀이를 했다. 그것을 알아차린 것은 한참을 물을 튀기며 놀고 난 후였다. 알고나니 내 몸매를 농락한 놈과 자존심이 상해서 더 이상 사이좋게 놀기는 싫었다. 흥미가 가셨다. 쟤는 별종의 고양이였다. 쟤 입장에서도 내가 별종의 인간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초면에 자기 앞에서 옷을 훌렁훌렁 벗던 헤픈 인간이었고 싫다는데도 본전을 못 잊어서 굳이 참치캔을 내밀던 눈치 없는 영장류였다.
어느새 약기운이 퍼졌는지 재채기는 잦아들고 있었다. 나는 얼레벌레 근 세 시간을 이곳에 갇혀 있었다. 성마른 이 녀석은 내가 약을 가지러 가는 그 잠깐의 사이에도 나를 불러재끼는 통에 이곳에 녀석을 혼자 두고 나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 녀석을 집안에 풀어놓을 수도 없었다. 나는 자발적으로 우리 집 욕실에 세 시간째 강금되어 있다. 놈과 함께. 그러고 보니 아침을 먹는 것도 까먹었다. 수업이 없는 날이면 신랑을 출근시키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들어와 늦은 아침을 먹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녀석이 정신을 빼놓는 통에 홀딱 까먹고 있었다. 예민한 나의 몸만이 식사 없이 먹은 약으로 인한 속 쓰림을 알려줌으로써 나는 그제야 내가 아침을 거른 사실을 알아차렸다.
녀석이 채근하기 전에 얼른 식사를 챙겨야 해서 어제저녁 신랑이 사들고 들어온 샐러드와 식탁에 놓여 있던 사과와 식빵을 집어 들어 욕실로 잰걸음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녀석은 한두 번의 경험으로 내가 몇 초 후면 돌아온다는 사실을 학습한 후여서인지 잠깐의 나의 부재로는 더 이상 울어재끼지는 않았다. 영민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요물스럽기도한...
내가 식사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는 녀석도 생각해보니 배가 고플 시간이었다. 두 번이나 까인 참치캔을 또 들이 밀 만큼 그렇게까지 눈치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나는. 혹시 몰라 식빵을 조금 뜯어 떨어뜨리니 역시나 외면한다. 닭가슴살은 먹으려나?... 아니었다. 닭가슴살을 떨어뜨리다가 실수로 먹다만 사과 조각이 함께 떨어졌다. 놀랍게도 녀석은 그 조각을 홀랑 집어 한참을 갉아먹었다. 그리고는 더 달라는 듯이 슈렉고양이가 되어 내 눈을 맞췄다. 여러모로 희한한 고양이었다. 나는 혹시 몰라 당근 조각을 건네주었다. 당근도 맛나게 먹는다. 샐러드에 박혀 있던 바나나도 주니 그것도 잘 먹는다. 나는 듣도 보도 못한 베지테리언 고양이를 만난 것이다! 아니 우유가 섞인 식빵도 거부하는 것으로 보아 유지방도 안먹는 비건 고양이가 틀림없다. 나는 베지테리언 고양이도 아닌 세상에서 하나뿐인 비건 고양이를 만난 것이다!
먹은 접시를 치우느라 주방으로 나갔다. 욕실로 돌아오는 길에 거실 소파에 잠깐 쉴 겸 앉는다는 것이 밥도 먹었겠다 식곤증과 약기운으로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깜박 졸았던 게 몇 분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가수면 상태에서 한 두 번의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몽롱함이 지속되다 정신을 차렸다. 나는 내 임무를 까먹은 채 잠이 들어버린 무책임한 고양이 집사였다. 후다닥 욕실로 갔다. 이렇게 오래 참아줄 녀석이 아닌 줄 진즉에 알고 있었는데... 내 예감이 맞았다. 녀석은 홀연히 사라진 후였다. 아까 샤워를 한 후 습기를 빼느라 창문을 조금 열어둔 것이 화근이었다. 창에 딱 녀석 류의 고양이 한 마리가 빠져나갈 법한 틈이 벌어져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게 집에 들이기를 망설였는데 막상 그렇게 나가버리니 또 서운해하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까는 적처럼 이곳에서 대치를 했는데 그가 없으니 세상을 잃은 기분이었다. 바닥에는 녀석이 먹다만 당근 조각과 사과껍질만이 쓸쓸히 남겨져 있었다. 아까 잠결에 나를 부르던 소리는 심심하다고 놀자는 싸인이었을까? 잘 놀다 간다는 인사였을까? 녀석이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아 나는 동물을 키우는 것에 반대 입장이 강경한 신랑을 어떻게 설득할까 잠깐 고민도 했었다. 좀 있다가 학교에서 돌아올 아들 녀석에게 고양이를 보여줄 생각을 하니 미리 흐뭇하기도 했다. 물을 좋아하는 녀석을 보고는 목욕을 시켜도 얌전하게 군다면 목욕을 시켜 마루에 들일까도 잠깐 고민했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저런 상념들은 이제는 부질없었다. 녀석은 인사도 없이 무정하게 사라진 뒤였다. 매번 나는 곁에 있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것을 놓치고 난 후에야 비로소 후회를 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의 갑작스러운 친한 척도 우리 집에 와서 편안하게 굴던 배짱도 내게는 낯설었다. 나는 시간이 좀 필요한 인간이었다. 누군가 내게 갑자기 마음을 열면 그것을 받아줄 줄도 모르고 먼저 경계부터 하는... 새가슴... 그 녀석을 담을 만한 그릇이 안 되는 거였다. 애초에...
또 다시 그런 특이한 비건 고양이를 만나는 동화가 반복될 리는 만무했다. 세상에 단 한 마리 물을 좋아하는 깔끔쟁이 비건 고양이. 성도 몰라 이름도 몰라 출신도 모르는 녀석을 찾을 수 있는 명분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야말로 내게 오늘 오전 일어난 일은 매직의 순간 그 자체였다. 마법과도 같은...
사족. 혹시 위의 사진과 비슷한 사과 먹는 고양이를 발견하시는 분은 제게 알려주세요. 그 아이 길고양이 아니고 우리 집 고양이예요. 제가 찍어 놓은 사진이 없어서 그러는데 위의 고양이와 많이 흡사하고 눈만 달라요. 눈동자 색이 갈색이랍니다. 얼굴에 저렇게 점이 있고 그 점이 등위에 까지 연결되어 있어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랑스러운 고양이랍니다. 참 얘는 물도 좋아해요. 혹시 우리 고양이인지 의심이 가시면 물총을 쏘아보세요. 잘 놀아요. 보시면 제발 연락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