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마라톤 후기

최악의 마라톤

by 달려보자go

나른한 월요일 점심시간.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는다. 어제를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도 황당한 마라톤 대회를 다녀왔다. 역대급이라는 단어는 이럴 때 쓰라고 만든 것 같다.

이번 마라톤 대회는 후기를 남기지 않으려 했다. 참가한 것을 후회할 정도로 대회 운영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흘러 ‘아, 오래전에 그런 일도 있었지.’ 하고 추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글을 쓰기로 했다.

총체적 난국, 어스마라톤

새벽 4시. 알람에 맞춰 겨우 잠에서 깼다. 오늘은 하반기 두 번째 하프마라톤에 출전하는 날이다. 평소보다 신속하게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새벽 5시 17분 지하철 첫차를 탔다. 하프코스 출발 시각은 7시 20분이다. 8시에 출발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10킬로미터 주자들과 겹치지 않도록 하프코스 출발 시각이 굉장히 빨랐다.

첫 차를 타고 광화문역으로 향했다. 역을 지날 때마다 참가자들이 올라탔다. 여의도역을 지날 무렵 열차는 가득 찼다. 드디어 광화문역에 도착했다. 6시 23분. 신속하게 4번 출구로 올라왔다. 미션이 시작됐다.

30분 안에 대회복장으로 환복하고 물품을 맡겨라! 탈의실은 필요 없다. 대회 복장을 겉옷 안에 입고 왔다. 벗기만 하면 된다. 적당한 구석에서 후다닥 겉옷을 벗어젖힌다. 창피함은 나만의 몫이 아니다. 여기저기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서 환복을 했다. 순식간에 대회 복장으로 준비를 마쳤다. 첫 번째 미션 통과. 두 번째 미션은 물품을 맡기는 것이다. 물품보관 대기줄을 찾아 나섰다. 줄이 100미터가 넘어 보였다. 긴 줄의 끝에 섰다. 6시 35분.

물품보관 자원봉사자가 4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상 기류가 감지됐다. 대회 진행자는 6시 50분에 하프코스 물품보관을 종료한다는 말만 수십 번 반복했다. 하지만 목소리에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수백 명이 줄을 서있는데 어떻게 마감하겠다는 거지?’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잠시 후 6시 50분이 조금 지나자 택배차량의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 문 닫는 것을 저지했다. 실랑이가 벌어졌다. 조금 위험해 보였다. 그리고 대혼란 파티가 벌어졌다. 여기저기서 꾹 참던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운영진은 보이지 않았다. 수백 명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누군가 택배차량의 아직 열려있는 문을 향해 물품을 던지기 시작했다. ‘뭐지?’

물품보관 스티커를 어디서 구했는지 참가자 스스로 물품에 스티커를 붙이고 택배차량에 짐을 던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람들은 셀프로 짐을 차량을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진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도 정신을 차리고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스티커 뭉치 하나를 낚아챘다. 그리고 소중한 스티커 한 장을 물품에 붙이고 차량을 향해 힘껏 던졌다.

‘1시간 40분 뒤에 꼭 만나자!’ 사람들을 뚫고 차량을 향해 다가갔다. 9423. 차량 번호를 되뇌었다. 피난을 떠나는 가족을 먼저 차에 태운 것처럼 뭔가 애틋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차량은 수많은 사람들을 남기고 떠났다. 짐을 맡기지 못한 사람들은 대회장 반대편에 있는 10킬로미터 물품보관 차량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표정은 다급했고 대회에 참가한 자신을 원망하는 듯했다.

문득 대회를 신청하던 4월이 떠올랐다. 1회 대회는 출전하지 않는 것이 기본 방침이지만 한강을 건너는 코스에 낚였다. 광화문에서 출발해서 숭례문, 청계천 등 서울의 명소를 돌아 마포대교를 건너 여의도에 골인하는 코스에 기대가 컸다. 명품코스라 해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5개월을 기다린 대회는 시작도 하기 전에 삐그덕 거렸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겨우 출발선에 섰다. 몸풀기에 ㅁ도 못 풀고 그렇게 레이스가 시작됐다.

한강을 건너는 아름다운 코스

기온 18도. 습도 65퍼센트. 청명한 날씨다. 교보빌딩 앞에서 출발. 여기서부터 단숨에 숭례문을 향해 달렸다. 초반에 추월하는 사람들 때문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보폭을 줄이고 낮게 깔아 뛰었다. 완만한 오르막이 약 1킬로 미터가량 이어졌다. 첫 번째 반환. 약한 내리막에서 힘을 빼고 살방살방 달렸다. 가볍고 경쾌했다. 오늘은 나이키 알파플라이 3을 신었다. 발을 구를 때마다 탄성에 감탄했다. 2킬로미터 지점. 4분 55초 페이스. 서울광장을 지나 청계천 구간에 진입했다. 주로가 좁다. 광장시장 부근에서 다시 반환. 5킬로미터. 4분 50초 페이스. 침착한 페이스로 진행됐다. 지루한 청계천 구간을 빠져나갔다. 우측으로 서울역사박물관을 두고 마포대교로 향하는 넓은 직선도로에 들어섰다. 이 지점부터 4킬로 미터가량 오르막이 이어진다. 첫 번째 고비다. 페이스는 4분 50초를 유지한다. 오르막은 자신이 있었다. 지난주 일요일 언덕훈련을 위해 수원 팔달산 10회전을 했다. 총거리는 30킬로미터, 누적 고도는 600미터에 달했다. 이 정도 오르막쯤은 힘들지 않았다. 종아리도 별다른 이상 징후를 보이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 전개다. 9킬로미터 지점에서 에너지젤 하나를 먹고, 10킬로미터 급수대에서 이온음료로 목을 축였다. 저 멀리 마포대교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레이스는 이제 중반을 넘어섰다. 마포대교를 올라 한강 위를 달렸다. 하늘이 좀 더 가까워졌다. 바람 때문에 페이스가 조금 떨어졌다. 경치는 좋지만 달리기는 힘들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이제 여의도 구간에서 몇 번의 반환이 있었다. 구불구불한 코스 탓에 레이스가 뚝뚝 잘려나가는 느낌이었다. 페이스 4분 50초. 마지막 하이라이트 서강대교를 향해 달렸다. 대교를 건넜다가 왔던 길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대교에서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4분 30초 페이스. 하지만 이후 쳐지기 시작했다. 결국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결승선에 들어왔다. 최종 결과는 평균 4분 47초 페이스. 1시간 41분으로 레이스를 마쳤다. 정신없이 겨우 시작한 레이스치고는 그럭저럭 만족했다. 대회 운영에 비해 코스는 정말 좋았다. 내년에 개최한다면 보완이 많이 필요해보인다. 참고로 물품은 무사히 찾았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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