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인 우리 아이는 학교 공부에는 좀처럼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고 의욕 없이 지내는 건 아닌데 책이나 교과서 대신, 아이는 자신의 목소리로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고,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성우라는 직업에 특별한 관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가 무언가에 열정을 보이고 꿈꾸는 순간만큼은 엄마로서 꼭 지켜주고 싶고,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럴 때마다 아이를 위해 어떤 경험을 선물할 수 있을지 늘 고민하게 되었고, 작지만 소중한 기회들을 계속해서 찾아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작은 기회를 발견했다. 집에서 걸어서 약 45분 정도 걸리는 도서관 앞에 자리한 풍무청소년 문화의 집에서 마련한 청소년 프로그램이었다. 이름하여 ‘무대 위의 나’. 무대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표현하고, 마지막에는 낭독공연 발표회까지 이어지는 커리큘럼이었다. 아이와 상의하지도 않고 일단 신청했는데, 다행히 아이는 해보고 싶었던 거라며 크게 기뻐했다.
첫 발걸음, 설레는 시작
프로그램은 6월 7일을 시작으로 매주 토요일 진행됐다. 첫 날은 자기소개 시간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우리 아이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그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지금이 순간에도 첫 날을 놓친 것에 대해 한참 아쉬워하던 아이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징크스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늘 첫 날 함께하지 못했다며 그 모습에서 이미 이 수업에 얼마나 기대를 걸고 있는지가 느껴졌다.
모집 정원은 10명이었지만 실제로는 6명이 모였다. 적은 인원으로 공연을 한다니 걱정이 앞섰지만, 아이는 “멤버들이 너무 좋다”며 즐거워했다. 남자 셋, 여자 셋. 서로 다른 학교, 서로 다른 경험을 지녔지만 단숨에 친해졌다고 했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곧장 집으로 오는 일이 드물어졌을 정도니, 이 만남만으로도 이미 아이에게는 값진 선물이 된 셈이었다.
길치의 모험
우리 아이에겐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바로 길치라는 점. 여름 무더위 속에 청소년문화의 집까지 걸어가기엔 멀었기 때문에 버스로 가는 법을 알려주었다. 네이버 지도를 보는 법도 알려주었지만, 금세 잊어버려 언젠가는 엉뚱하게 인천 임학역까지 가버린 일도 있었다. 당황했을 아이를 다독이며 “좋은 경험을 한 거야”라고 에둘러 칭찬했지만, 속으로는 걱정 한 가득이었단 사실을 아이는 알까?
그런데 연습은 사람을 바꾸는 훌륭한 재주가 있다. 시행착오를 겪더니 이제는 제법 스스로 버스를 타고 목적지까지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안되면 걸어서라도 목적지를 찾아가고 집으로 돌아왔으니... 무더위에도 꽤나 단련되었을 터다. 그렇게 홀로 길을 찾아 연습을 위해 오가던 그 길 위에서, 드디어 아이는 ‘무대 위의 나’ 낭독공연을 준비하며 서서히 완성해나가고 있었다.
그날의 아침, 긴장된 기다림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러갔을까. 어느새 지난주에는 ‘무대 위의 나’ 낭독 공연에 가족을 초대한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프로그램을 신청할 때만 해도 아직 멀게만 느껴졌던 마지막 무대가, 이렇게 훌쩍 다가올 줄은 몰랐다. 10주 동안 매주 토요일을 함께했던 시간이 어느새 흐르고, 이제 아이와 함께한 이 특별한 여정이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정말 벌써 마지막이구나’라는 생각에 마음 한켠이 뭉클해졌다.
공연 날 아침, 아이는 리허설을 하기 위해 한 시간 먼저 공연장에 갔다. 우리 가족은 도서관에서 대기했다. 아이는 9시, 가족은 10시. 딱 한 시간의 차이였지만 책을 펼쳐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드디어 공연 시간이 다가오고, 우리는 공연장으로 향했다.
무대 위의 아이들, 각자의 이야기를 담아
공연은 단순한 낭독회가 아니었다. 6명의 아이가 직접 작가가 되어 대본을 쓰고, 역을 캐스팅해 연기까지 하는 방식이었다. 그들의 작품은 놀라웠다. 이야기의 주제는 심오했고, 때때로 철학적이었다. 정말 이게 중학생이 만든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수준이 높아보였다.
더 인상 깊었던 건 무대에 선 아이들의 태도였다. 긴장하는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한껏 몰입해 관객을 끌어당겼다. 진지함과 가벼움을 넘나들며 펼쳐진 짧은 시간이었지만, 공연이 끝날 무렵 나는 진심으로 놀라움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와, 이걸 중학생들이 해냈다고?”
관객과의 대화, 빛나는 순간들
공연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 이어졌다. 질의응답 시간엔 단 한 명의 질문밖에 없었지만 아이들은 그 질문에 재치 있게 답변하며 무대를 이어갔다. 그중에서도 내 아이의 반짝이는 모습이 특히 눈에 띄었다. 어른 관객들은 자기 아이가 무사히 공연을 마쳤다는 것만으로도 안도했는지 참여에는 소극적이었다.
무대를 더욱 빛내주기 위해서는 관객들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공연이라는 특별한 자리에서, 용기를 내어 자연스럽게 마음속 우러나오는 소감을 전했다. 소감을 말하는 순간, 아이의 눈이 동그래지면서 놀라워했고 많은 박수를 받았다. 사실 이곳에 모인 가족들 모두의 마음이었으리라.
아이는 무대 아래서 신이 난 표정으로 내 모습을 바라보더니, 공연장을 나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사람들을 선동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아.”
그 말에 웃음이 터졌지만, 동시에 공연의 순간순간들이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특별한 추억이 되었는지 새삼 실감했다.
오늘을 기억하며
이번 공연은 단순히 아이 혼자만의 성취가 아니었다. 프로그램을 발견하고 신청한 그 순간부터 시작해, 아이와 함께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번 공연에 아이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임했는지를 직접 느낄 수 있었다. 그 과정 속에서 아이는 분명 성장해 나가고 있었고 나 또한 아이를 관찰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공연을 마치고 나서 말이 끊이지 않는 아이의 환한 모습을 바라보며, 하나의 프로젝트를 완수했다는 뿌듯함과 기쁨. 그리고 아이가 보여준 자신감과 행복한 에너지는 그날 하루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주었고, 이 기억은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