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이상한 날의 사직서

by 와이

"와이야, 아까 말한 보고서 내일 오전까지 줘." 바람이 쌀쌀한 12월의 어느 날, 새로운 부서로 발령을 받자마자 팀장님이 나에게 지시를 내렸다. "네." 보고서를 쓰는 일은 회사에서 하는 여러 직무 중 내가 좋아하는 일이다. 한때 문달(문서의 달인)이라고 불린 적도 있던 나였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했다. 보고서를 쓰기 위해 새로운 부서의 폴더를 열어보는데 손이 떨렸다. 폴더를 열고 찾는데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다. 팀장님을 찾아갔다. 나의 여태껏 삶 속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눈물이 갑작스레 두 뺨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한 손은 왼쪽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뭔가 심장을 옥죄는 느낌이 있었다. "팀장님, 저 보고서를 못 쓸 것 같아요." 팀장님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며칠 후, 부서에서 관리하는 프로젝트들의 진도를 점검하는 회의가 잡혔다. 팀원별로 각자 점검할 프로젝트를 배분했다. 갑자기 가슴이 떨려왔다. 관련된 문서 파일을 열었지만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다시 가슴이 아파왔다. 하루 종일 문서 파일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다가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나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 것 같아" 남편이 말했다."미쳤어? 당신이 회사를 그만두면 우리 생활비가 반으로 줄어드는 거야. 절대 안 돼!" 나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생활비가 반으로 줄어든다는 것은 대출도 못 갚고 더더군다나 저축은 꿈도 못 꾼다는 것인데 나의 머릿속은 이런 계산을 하지 못했다. "더 이상 회사 다니는 게 불가능해." 남편의 얼굴이 붉게 일그러졌다. "회사 그만 두면 이혼이야." 나는 더 이상 말을 않고 침대에 누웠다.


다음날 아침 나는 인사팀으로 가서 사직서를 전달했다. 담당 직원이 물었다. "오늘 자로 하시겠어요?" "네." 24살 때부터 16년을 다닌 친정 같은 회사였다.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저 퇴근해도 돼요?" 하고 물었다. 직원이 반납해야 할 것들을 안내해 주더니 퇴근해도 된다고 했다. 나는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집으로 향했다.


새로운 부서로 발령받기 전 나는 무척이나 불안한 상태였다. 당시 나는 정신적으로 몇 번의 이상한 일을 겪었다. 회의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멍하게 있다가 나의 발언 시간에 가만히 있기도 했고, 직원들 간의 잡담시간에 머리에서 번쩍하는 빛이 나 어지러워 쓰러질 뻔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때 그 순간뿐이지 나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일상을 그럭저럭 살아내고 있어서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쯤 직원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피해 다니는 게 느껴졌다. 나에 대해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것은 나의 망상이었을까, 진실이었을까.


새로운 부서에 발령받기 전 어느 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진정제 주사를 맞은 후 외래 예약을 잡고, 외래 예약 전까지 먹을 약을 처방받았다. '자이프렉사.' 약 설명서에 조현병의 치료제라고 적혀 있다. 조현병이라고? 내가 응급실로 들어온 전공의에게 회사 직원들이 나를 감시하고 있고 나는 해고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다고 말했는데, 그래서 아마 자이프렉사를 처방했나 보다.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당시 직원들이 나를 감시하고 있다고 느꼈다. 내가 야근하는 날은 꼭 한 명씩 나를 감시하는 듯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망상인가? 지금도 그것이 망상인지, 착각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느낄 수도 있는 것이지 그렇다고 조현병 약을 먹는 것은 너무 심했다. 그럼에도 그 당시 불안으로 나약해진 나는 처방된 약을 꼭꼭 챙겨 먹었다. 감정은 무뎌졌고 불안은 사라졌지만 머리는 멍했고 식욕이 폭발해 3주간 몸무게가 3kg이 쪘다.


다음 외래 예약날 대학병원 교수님을 만났다. 투명스러운 이미지의 교수님이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스타일의 교수님이었다. "보호자는 안 왔어요?" "네" 남편은 회사 일이 바쁘다며 오지 않았다. 교수님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치 잘못을 하고 혼나는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자이프렉사는 식욕이 너무 당겨요." "그럼 다른 약으로 바꾸어 줄게요" 저의 병명은 뭐예요? "아직 얘기할 수 없어요. 상세 불명이에요. 몇 개월 지켜봐야 합니다."


한편, 나의 첫 번째 사직서는 결과적으로 수리되지 않았다. "휴가를 좀 쓰고 쉬고 오는 것은 어때?" 하며 회사에서 배려를 해주었다. 자이프렉사 대신 처방받은 약은 눈에 기름이 낀 것처럼 흐리고 축농증을 유발하는 심각한 부작용이 있었다. 회사에서 쉴 새 없이 코를 푸는데 나중에 코피가 나도 코가 계속 나왔다. 옆자리의 동료가 내가 코를 풀 때마다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비인후과 선생님도 이렇게 오래가는 축농증이 있다니 이상하다고 다른 원인이 있을 거라고 했다.


한 후배가 나를 호출했다. 지난번 사직서를 내고 일주일 회사를 안 나온 것에 대한 응징이었다. "일도 많은데 갑자기 휴가를 내시면 어떻게 해요?" 서열상으로 한참이나 어린 후배한테 이런 취급을 당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내가 일을 펑크 낸 셈이니 후배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미안해요. 몸이 안 좋았어요.""아팠던 거예요?""네.""아팠던 거면 할 수 없죠"


그렇게 눈물 흘리고 불안하고 멍했던 12월이 지나고 새해가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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