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것인 듯 오래된 증오와 영원할 것 같던 분노도
허망하게 사라져 깊은 한탄뿐인데
작열하는 날을 지나 가을에 도착한 삶은
껍데기인 듯 한없이 가벼워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시간에 업혀 도착한 계절은 가난하고 가난하여
마음에는 찬바람이 들고 두 손 시린 한낱 빈집일 뿐인데
나는 이제 어찌하라고
가을은 속절없이 무르익어 완연한 시절이어라.
아니, 나에게 완연이라는 말은 가당치 않다.
언제나 가을이 절정에 치닫기도 전에 겨울은 찾아오는데
내 나이도 그렇듯 무르익기 전에
겨울 저녁 어스름에 지워지는 동네 뒷길처럼
손댈 수도 없이 단단히 얼어버리진 않을는지.
모든 것이 낯설어 바닥만 보며 걷는데
삶은 여전히 흘러 혹독한 계절을 따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