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첫 계산기 앞에서 마주한 현실
1. 퇴직금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퇴직 후 첫 달, 나는 계산기를 꺼냈다.
'퇴직금 x n개월 = 생존기간'
이 단순한 계산이
내 삶의 지속 가능성을 결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생각보다 많아 보였던 퇴직금도
지출 항목을 하나씩 넣다 보니
숨이 턱 막혔다.
고정비, 건강보험, 통신비, 교통비, 식비,
부모님 용돈..
한 달 평균 생활비가 250만 원이라면,
퇴직금 1억 원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겨우 3년 남짓.
그마저도 아무 돌발 상황이 없다는 가정 아래였다.
'이 돈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가 아니라,
'이 돈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로
생각을 바꿔야 했다.
2. 매달 들어오는 돈이 없다는 공포
회사 다닐 땐 월급날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이 됐다.
월급은 내 생애 처음으로 경험한
‘정기적 보장'이었다.
그 리듬이 사라지자, 달력이 무서워졌다.
이제는 어떤 날에도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건 단지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현재 사회로부터 '필요한' 사람이
아니게 된 것이다.
지금은 지출의 주도권이 아닌,
수입의 구조를 새로 짜야할 시간이다.
그래서 국민연금 수령 시기를 다시 검토했고,
퇴직연금 수령을 일시금에서 연금 방식으로 바꿨다.
월급이 사라진 자리에는,
'나만의 월급 구조'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
3. 노후 비용은 어디서부터 계산해야 하나
노후비용을 계산하는 건 감정적으로도 쉽지 않다.
그건 곧 '내가 앞으로 얼마나 살 것인가'를
묻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주해야 했다.
노후에 1인 월평균 최소생활비가 120만 원
정도이고, 여유 있는 생활을 위해서는
인당 200만 원 정도가 필요하다고 한다.
2인 기준이면, 매달 최소 250~ 400만 원이
필요한 것이다.
문제는 단순한 생활비 외에도
의료비, 경조사비, 그리고
예기치 못한 일들이 항상 존재한다는 점이다.
나는 그 모든 걸 엑셀에 정리해 봤다.
그제야 비로소, '재무설계'가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라 살아있는
나의 그림으로 다가왔다.
4. 지출을 줄이는 삶은 축소가 아니다
처음에는 지출을 줄이자는 말이
'내 삶을 줄이자'는 말로 들렸다.
커피 한 잔도 망설이고, 외식도 미루고,
친구와의 만남도 꺼리게 됐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예전엔 바빠서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
몰랐는데, 지금은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가 보이네."
그 말이 맞았다.
줄인다는 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선택한다는 의미였다.
지출이 줄어든 만큼,
나는 시간을 얻었다.
그 시간에 산책을 하고, 책을 읽고,
때론 동네 문화센터에서 무료 강의를 들었다.
지금은 줄이는 삶이 아니라,
나에게 맞게 조정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5. 은퇴 후에도 돈은 흘러야 한다
퇴직 이후 '돈을 모은다'는 개념은 희미해졌다.
하지만 '흘러야 한다'는 개념은 더 분명해졌다.
돈이 멈추면 삶도 정체된다.
그래서 나는 소소한 수익 구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재능기부로 시작했던 글쓰기를
이제는 브런치 연재로 이어가고,
소규모 강의나 원고 청탁도 받는다.
투자도 재정비했다.
배당주와 안정적인 ETF를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했다.
현금 흐름의 리듬은 감정의 리듬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은퇴는 끝이 아니라
돈의 구조를 재설계하는 시작이었다.
더 이상 '많이 벌자'가 목표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흐름'을 만드는 것이 중심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