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중심으로 다시 쓰는 관계의 지도
1. 회사를 나와도 친구가 남을까
퇴직하고 얼마 안 지나,
누구보다 내 전화를 기다릴 것 같았던
후배에게 연락을 했다.
"잘 지내지? 같이 점심이나 할까?"
대답을 머뭇거리던 후배는 조용히 대답을 했다.
"죄송해요 선배님... 요즘 너무 바빠서요."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 후배도 예전의 나처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다.
하지만 알면서도 괜히 서운했다.
회사를 나왔다는 건,
단순히 직장을 떠난 게 아니라
기억될 이유가 하나 줄어든 것이기도 하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2. 가족보다 회사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은퇴 후엔 가족과 시간이 많아질 줄 알았다.
아내와도 더 가까워지고,
자식들과도 이야기 나눌 여유가 생기겠지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까워진 만큼 어색해졌다.
낮에 마주치는 시간은 많은데,
정작 마음을 나누는 대화는 줄어들었다.
회사를 다니던 30년 동안,
나는 가족에게 '시간'을 준 게 아니라
'결과'를 주려 했다.
그 시간 동안 내가 가장 많이 대화를 나눈 상대는
팀장과 과장, 그리고 거래처 담당자였다.
3. 배우자와의 거리, 1미터도 좁혀지지 않는다
하루 종일 집에 있다 보니,
마주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런데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조용한 방해'가 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내가 다가가면,
아내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하고,
아내가 말을 걸면,
나는 자꾸만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했다.
30년을 넘게 함께 살아온 사이지만,
실은 함께 사는 법을 모른 채 살아온 사이였다는 걸
퇴직 후에서야 비로소 느꼈다.
부부 사이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말을 거는 타이밍',
'혼자 있게 내버려 두는 매너',
'고마움을 표현하는 습관'.
그 모든 게 다시 배우는 관계의 기술이다.
4. 손주와 보낸 하루가 삶을 바꿨다.
손주가 우리 집에 왔던 어느 날,
아내는 말했다.
"잠깐만 애 좀 봐줘, 일 좀 보고 올게."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애를 보는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가물했다.
하지만 2시간, 3시간...
시간이 흐르자
내가 먼저 아이에게 말을 걸고,
장난감을 꺼내주고,
작은 웃음을 보게 되었다.
손주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퇴직했는지, 뭘 하는지, 얼마나 버는지,
그저 나와 시간을 보내주었을 뿐이다.
그날, 나는
관계란 결국 시간과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생긴다는 걸 배웠다.
내가 멀어진 관계만 붙잡으려 했지,
지급 내 앞에 와준 사람은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던 것이다.
5. 이제는 관계도 연습이 필요하다
퇴직은 관계를 자연스럽게 정리해 준다.
어쩌면 회사에서의 인간관계는
회사가 만들어준 가상의 연결일지도 모른다.
진짜 관계는
이제부터 다시 만들어야 한다.
더 정직하게, 더 느리게, 더 깊이 있게.
나는 조금씩 시도하고 있다.
동네 주민센터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나가보고,
독서 모임에도 가보고,
오래된 친구에게 먼저 연락을 해본다.
어색해도 괜찮다.
관계는 익숙해지는 일이니까.
지금은 나를 중심으로,
내가 원하고 지킬 수 있는 관계의 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누가 나를 찾아주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내가 먼저 걸어가는 사람이 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