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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하늘 Nov 13. 2023

23. 11. 10.

출동과 시험, 그리고 생각 찌꺼기들

<1>

어제는 펌뷸런스 출동이 있었다. 펌뷸런스 출동은 '소방펌프차'와 '앰뷸런스'가 합쳐진 말인데, 구급차의 영역이었던 구급출동을 펌프차 또한 출동하게 된 데서 나온 말이다. A군 A동에 구급출동이 발생하면 구급차는 출동을 나가게 되고, 그때 A군 A동의 관내에선 구급차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때 A동에서 구급출동이 한 번 더 벌어지게 되면 인접한 B동의 구급차에게 출동명령을 하달하게 되는데 이때 B동의 구급차마저 자리를 비웠다면 펌프차(화재진압대)에게 출동명령을 내린다. 최근부터 구급대원이 아닌 화재진압대원, 구조대원들 또한 소방학교에서 2주 구급교육을 받고 실무에 오게 된다. 물론 현장에서 뛰는 구급대원들의 역량에는 한참 미치지 못할 정도지만 구급대가 도착하기 전 기본적인 처치를 실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2>

출동지령서에 찍힌 내용은 '심정지'였다. 센터 근처 1km 남짓 떨어진 요양원이었다. 좁은 골목 위에 위치한 요양원이었지만 이전에 자동화재 속보설비 출동으로 위치를 알고 있었던 터라 막힘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선임반장님과 주임님, 나는 앞다퉈 어둑한 공기를 헤치고 길을 뛰어 올라갔다. 촌각을 다투는 심정지이기 때문에 최대한 빠르게 구조대상자에게 닿아야 했다. 요양원이 가까워지고 문을 열자 적막한 공기가 감돌았다. 아주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요양원과 병원은 사람을 필요 이상으로 차분하게 만드는 기운이 있다. 침대가 총넷이었고 가장 바깥쪽 할머니가 신고대상이었는데 나머지 세 분은 시큰둥하고 멍한 눈빛으로 벽을 응시하거나 우리를 바라봤다. 차가운 길 위에서 심정지 환자가 있었다면 모두 그 곁을 에워싸고, 공기마저 부산스럽게 흩어졌을 것이다. 난 이상하리만치 차분한 이 공기가 낯설고 버거웠다.


<3>

다행히 할머니께서 맥박이 있었다. 맥을 짚을 땐 손목과 목, 안쪽 허벅지에 손을 갖다 대는데 왼손으로 손목, 오른손으로 목을 짚어보니 미세하지만 분명한 맥박을 느낄 수 있었다. 검지와 중지, 얇은 손가락 피부를 밀고 들어 오르는 파동을 느꼈다. 얕지만 분명하게 들썩이는 삶의 소리였다. 맥박이 잡힌다는 것은 심장이 정지했다는 게 아니다. 이때는 가슴압박을 실시하지 않는다. 특별구급대가 오기 전까지 활력징후를 체크했다. 체온과 산소포화도, 맥박과 호흡수를 기록했다. 혈압을 측정하려 했지만 기력이 쇠해서였는지 혈압계에선 오류가 나왔다. 어쩔 수 없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보까지 포스트잇에 적었다. 환자는 자주 색색거렸다가 한 번 크게 숨을 쉬었다. 가끔 생을 다하고도 호흡을 하는데, 이건 임종호흡으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살아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내심 걱정을 하던 찰나 사이렌 소리가 밤공기를 뚫고 요양원 근처까지 울려 퍼졌다. 특별구급대가 도착했고, 우리는 환자를 인계한 뒤 복귀했다. 화재진압대원인 난 주로 화재 상황과 맞닥뜨린다. 우리는 생명이 있는 누군가와 만날 기회가 적다. 화재와 싸우기 때문이다. 화재현장에서 생명을 만나면 순간 긴장도가 높아진다. 사람이 그곳에 있다는 건 작든 크든 인명피해가 생길 우려가 굉장히 크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구급현장은 생명이 있는 누군가와 만날 기회가 많다. 매 출동마다 살아있는 누군가를 대한다는 건 감정 소모나 에너지 소모가 크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구급대원들을 많이 존경한다. 늘 곁에 있으면서도 자랑스럽고 든든한 분들이다.


<4>

얼마 전 진급시험이 있었다. 전국 소방공무원이 11월에 시험을 쳤는데, 좋든 싫든 여기저기서 진급에 대해 많은 얘기가 오간다. 누가 몇 개를 틀렸다더니, 이번에 진급이 될 거라느니 하는 얘기들이 심심찮게 들린다. 아무래도 진급을 하고, 못 하고 하는 문제는 여기서 꽤 큰 비중을 두고 있는 사안이다. 바깥에서 얘기하는 연봉에 직결된 것이 호봉과 계급이니까. 진급시험에 낙방했다는 것이 곧 이번 연봉협상이 결렬됐다, 진급시험에 붙었다는 말이 내가 이번에 치킨집을 차렸는데 대박이 났다 하는 얘기와 결이 다르지 않다. 늘 이런 곳에 서면 난 그랬다. 우선 피로감이 몰려왔다. 남의 시선에 나를 재단하는 인상, 그렇게 자르고, 자르고, 자르다 보면 결국 손톱만큼 남아버린 매 모습이 낯설었다. 통째로 오려내고 싶던 학창 시절을 면포에 넣고 쭉 짜보면 남는 건 공부밖에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공부 스트레스'. 그렇다고 대학이라도 잘 갔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난 누군가 맞다고 하는 길에 신물이 난다. 아마 내가 그렇게 학창 시절을 보냈어서, 자성의 n극과 s극처럼 모두가 맞다고 하는, 더 정확하게는 모두가 타성에 젖어 맹목적으로 가려고 하는 길에 이유 모를 반감이 서린다. 스무 살 무렵부터 지금까지는 후회가 없다. 다시 태어나도 기꺼이 그럴 거고, 분에 넘치도록 많은 시도를 해봤으니까. 하지만 십 대로 넘어가면 아니다. 십 대의 모든 길이 사무칠 만큼 큰 회한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 한 맺힌 회고의 중심엔 못하는 공부를 붙잡아서, 하루종일 책만 봤다는 까닭이 있는 게 아니라 남들 따라 '무작정' 따라가서라는 이유가 적혀있다.


<5>

어쩌면 내가 시험 하나에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는 이유는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사유가 깔려있을지 모른다. 소방생활을 하며 진급이 우선인지, 어떤 교육에 참가하는 것이 우선인지, 소방관으로서 필요한 자격을 갖추는 게 우선인지, 아니면 불필요하게 너무 많은 생각에 빠져있는 건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충분한 생각 없이 결정하고 덜컥 시작하고 싶진 않다. 사는 게 짧다는 걸 많이 절감하고, 앞으로 더더욱 내 삶의 속도는 빨라질 것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싫고 좋고를 떠나 가치 있는 시간들로 채우고 싶다. 잘 살고 싶다. 여기서 잘 산다는 건 내가 살았던 생이 행복하고, 슬프고, 짜증 나고, 가끔 벅차고, 싫증이 나기도 했지만 다시 기꺼이 태어나 살고 싶다는 의미다. 그 속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가정은 '남들이 한다고 해서, 모두가 가는 길이라서, 다 하는 거니까 나도 해야만 할 것만 같아서, 따위의 결정을 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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