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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하늘 Jan 05. 2024

24. 1. 1.

새해

해가 넘어가는 와중 가장 위안이 되는 점은 비교적 '다시 시작' 버튼을 누르기 쉬운 마음상태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 그리고 오늘의 해와 내일의 해는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단순히 새로운 달력을 써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토록 어려웠던 다시 시작 버튼을 쉽게 누를 용기를 준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작년 겨울, 며칠간 서울여행을 다녀온 이후 오랜만에 살아있음을 느꼈다. 발가락 하나하나에 힘이 실리는 기분, 족적이 움푹 패일 정도로 땅 위에 내 몸이 단단히 고정되는 기분, 하루를 온전히 내 식대로 살아가는 듯한 짜릿한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사는 건 밀물 썰물처럼 왔다 가는 파도와 같아서 그토록 설레는 감정도 금세 시들해지더라. 당시 읽고 있던 앵무새 죽이기라는 책이 미친 듯이 지루했던 것을 시작으로 책을 넘기기 힘들어졌고, 글을 등한시하자 활자에도 영 마음이 닿지 않았다. 그래서 열심히 쓰던 일기도 어느샌가부터 놓게 되었고, 늘 그렇듯 다시 보통의 삶을 살게 되었다. 조그만 행복과 잦은 자책, 거대한 무기력감이 공존하는 뜨뜻미지근한 일상 말이다.

아마 3월이었다면, 아마 5월이었다면, 아마 7월이었다면 다시 일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핑계가 충분하니까. 이렇게 애매한 시기엔 '다음 여름부터 시작하면 되지, 상반기부터 시작하면 되지, 다음 달부터 시작하면 되지' 식의 핑계가 힘을 얻는다. 하지만 1월 1일은 무언가 시작할 용기를 주는 시기다. 그런 근거 없는 믿음과 까닭 없는 자신감을 주는 새해가 고맙다. 지금 내가 내리는 다짐들이 한 두 달 정도 지나면 낡고 해져 힘을 잃을 걸 알지만. 혹여 아니더라도 우선 그렇게 믿는다. 보통 그랬으니까. 그러면 나는 그때 다시 또 다른 목표를 세우려 한다. 올바른 비교는 아닐 수 있지만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빚을 돌려 막는 것처럼 하고 싶은 일을 돌려 막아 머리를 속이려고 한다. 난 이렇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게 내 입맛에 맞더라. 뭉근한 성공보다 조그만 인스턴트 성공이 맞는 인간. 호흡이 짧은 일들을 그때그때 하는 게 잘 어울리는 인간.


요즘 몇 가지 드는 생각이 있다. 우선 싸우지 말 것.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하자면 어떤 일에 쉽게 열을 올리지 말 것. 어제 수영장에서 자유형을 돌고 있는데 옆 레인에서 투닥거리는 음성이 들렸다. 참방거리는 물소리를 이길 정도로 다분히 공격적인 어사였다. "아니 와 그라는교?" -내가 뭘 그래? "아니 이리 천천히 가모 앞이 막힌다 아입니까?" -나 수영 잘해! 연수반인데 뭘 막혀 "아니... 연수반이고 뭐고 지금 본인이 느리게 가니 다른 사람들이 옳게 수영을 몬한다 아입니까?" 대충 들어보니 옆 레인에서 한 분의 속도가 너무 느려 레인을 도는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가는 말이 날카로우니 오는 말도 거칠었다. 결국 열을 내던 분이 먼저 자리를 피했다. 몇 바퀴 돌다 샤워장으로 몸을 옮겼다. 다투는 걸 듣기만 했는데도 피곤했다. 아마 나였으면 다른 레인으로 갔을 것이다. 여기선 내 방법이 맞다, 틀리다를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나라면 그랬을 것이고, 그렇게 하는 이유는 오로지 다툼을 피하기 위해서다. 다투면 감정을 소비한다. 보통 서로 다툴 때 상대방은 내 시각에선 아무리 틀린 말이라 하더라도 저 사람은 저 사람대로 생각이 있다. 그리고 그게 맞다고 생각하니 말을 보태는 것이다. 만약 본인이 틀렸다 생각하면 이미 잘못했다고 했겠지. 공연히 자존심을 부리는 것이든 어쨌든 상대방의 입에서 잘못했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 건 본인도 할 말이 있다는 거다. 그럼 내 입장에선 게임 끝.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 왜냐면 내 입장에선 내가 맞고, 그의 입장에선 그가 맞는 거니까. 더 얘기해 봤자 서로 감정싸움만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언성이 높아질 것이고, 더 나가면 머리에 열이 오를 거다. 게다가 요즘같이 어지러운 시기엔 누구 하나 잘못 만나면 인생이 일그러질 수도 있다.


또 드는 생각 한 스푼. 30대에 극한 스포츠를 해보자. 작년 처음으로 철인 3종을 경험했다. 예전부터 그런 극한 스포츠에 눈길이 갔다. 철인 3종도 종목이 여러 개 있는데 쉽게 얘기하자면 초급, 중급, 고급이 존재한다. 초, 중, 고급 모두 수영-사이클-마라톤 종목으로 이어지는 건 동일하나 거리가 다르다. 초급은 수영 0.75km, 사이클 20km, 마라톤 5km다. 중급은 1.5km / 40km / 10km이고, 고급은 자그마치 3.8km / 180km / 42.195km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고급이라 얘기하는 철인 3종 아이언맨 코스를 나가면 살이 하루 만에 5kg 이상 빠지는 경우도 있다. 경기시간은 자그마치 12시간 정도다. 오전 9시에 경기를 시작하면 밤 9시에 경기가 끝난 다는 얘기다. 그 열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물속에서 팔을 돌리고, 자전거 안장에 앉아 발을 굴리고, 숨을 헐떡이며 지면을 찬다. 그동안 선수들은 오로지 에너지 흡수를 위해 젤리형태로 만들어진 고농축 탄수화물인 '파워젤'만 먹으며 꾸역꾸역 경기를 진행한다. 난 이런 스포츠를 꽤 사랑하는데 이건 어렸을 때부터 남들이 하지 않는 걸 하고 싶었던 성향에서 비롯된 듯하다. 철인 3종 아이언맨 코스를 할 정도로 몸이 올라오면 사막마라톤도 달려보고 싶다. 죽기 전에 반드시, 반드시. 꼭. 그런데 이런 스포츠는 예상하다시피 상당히 높은 수준의 훈련을 요구한다. 그래서 골똘히 생각해 보니 서른이 넘어가면 힘들 것 같다. 혹시 가정이 생긴다면 더 쉽지 않을 게 확실하다. 그런데 이걸 못하고 눈 감는다면 너무 억울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지금이 적기다. 물론 스무 살 혈기왕성한 수준만큼 몸이 다부진 건 아니지만. 그때 난 이때가 영원할 줄 알았지. 언젠가 철인이든 사막마라톤이든 할 줄 알았고, 그때 가서 하면 어떻게든 될 줄 알았지. 이렇게 시간이 쏜살같이 달아날지 몰랐던 거다. 손틈 사이로 모래알이 빠져나가는 듯 시간이 재빨리 내 품을 벗어난다. 시간이 갈수록 유실되는 시간의 흐름도 더 빨라지는 듯하다. 그러다 보니 정말로 지금 하지 않으면 이제 기회는 없을 것만 같다. 30대를 마치기 전, 그나마 체력적으로 몸이 따라줄 때 철인 3종 아이언맨코스와 사막마라톤을 완주해보고 싶다.


마지막 생각 한 스푼 더. 올해가 가기 전 겨울쯤 책을 만들고 싶다. 정식 출판을 해서 작가가 되겠다는 게 아니고 단지 기록용으로 만들고 싶다. 글이 잘 나온다면 지인들에게도 선물하고 싶다. 일기나 블로그에 내가 쓴 글들 중 좋은 글을 모아 예쁘게 책으로 보관하고 싶다. 이전에 연간임하늘이라고 내가 오려 붙인 굉장히 허접한 책이 있는데, 그걸 발전시켜 겉지도 만들고 좀 더 태가 나게 만들어 책장에 꽂아두고 싶다. 그렇게 하려면 돈과 글이 필요하다. 돈은 그렇게 부담스러운 정도는 아니고, 문제는 글이다. 지금 이렇게 쓰는 글도 퇴고하면 문장이 최소 다섯 개 내지 열 개 정도가 고쳐진다. 예전에 연간임하늘을 만들 땐 한 달 동안 3번, 4번을 다시 고쳐 썼다. 내가 당시 쓸 수 있는 글 중 제일 잘 썼다고 생각한 서른 개 정도의 글을 추렸는데도 말이다. 올해를 마무리할 때 과연 내 마음에도 쏙 드는 그런 글들이 여러 개 나올지, 이 다짐이 언제 또 모래성처럼 부서질지 무르겠지만 우선 지금 다짐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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