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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 Aug 11. 2024

여행의 맛

240811

푹푹 찌던 2019년 여름, 난 비행기에 올랐다. 목적지는 태국, 씨빠툼 대학이었다. 당시 항공 승무원이 꿈이었던 난 항공 비즈니스를 배우기 위해 교환학생에 지원했다. 영어로 수업이 진행된다는 점, 기숙사와 식비가 한 달에 70만 원 정도면 충분하다는 점, 그 점이 날 이곳으로 오게 했다. 비행기로 몇 시간을 날아 태국 수완나품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밖으로 첫발을 내딛자 꿉꿉한 동남아 습기가 얼굴을 덮쳤다. 따뜻하고 축축한 공기도 내 팔과 목덜미를 감쌌다. 이곳이 동남아임을 절절히 느끼고 있던 순간 두 명의 학생이 날 찾아왔다. "나이스 투 미츄!" 살갑게 인사를 건넨 사람은 대학교에서 내 생활을 지원해 주기 위해 나온 학생이었다. 그들의 도움을 받고 기숙사에 도착해서 짐을 풀었다. 방으로 가는 길 곳곳엔 '찡쪽'이라 불리는 도마뱀이 벽에 붙어있다가 인기척이 들리자 요리조리 숨었다. 끼익 거리는 문을 열자, 다섯 평 정도 되는 아담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책상과 의자, 조그만 벽걸이 에어컨, 세월이 느껴지는 옷장이 있는 이곳은 이제 곧 내 집이 될 공간이었다.

난 빠르게 적응했다. 태국 학생들은 한국에 무척 호의적이었다. 코리아라면 무조건 '예스'였다. 낯을 가리던 내게 선뜻 먼저 다가와 말을 걸고, 나에 관해 묻고, 신기해하고,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생각보다 우리나라가 대단한 나라임을 외국에 나갔을 때 비로소 느끼는데, 바로 한류 문화를 실감할 때다. 우리나라 노래라든지 영화, 드라마 등 이런 디지털 매체에 대해 나보다 더 빠삭하게 꿰고 있었다. 지금은 활동하지도 않는 '투애니원'이라는 그룹 노래마저 즐겨 듣는 모습을 봤을 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소름 돋는 우리나라 문화 영향력이었다. 난 감사하게도 그 인기에 편승하여 원만한 학교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하교 후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엔 이른바 먹자골목이 있었다. 부서진 보도블록에 아슬하게 자리를 펴고 장사를 하는 길거리 노점상이 있었는데, 평소엔 꽤 이국적인 비주얼이어서 감히 도전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먹어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고기와 소시지 등 육류를 꼬챙이에 끼워 구워 파는 꼬치구이 장수, 리어카를 개조해서 나무판자 안에 얼음과 각종 수박, 용과, 망고, 파인애플을 넣어놓고 파는 과일 장수, 판자 위 조그만 웍에 이것저것 향신료를 넣고 태국식 볶음면인 팟타이나 볶음밥인 카오팟을 팔던 팟타이 장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육수에 쫀득한 면을 넣어 팔던 국수 장수, 족발같이 생긴 고기를 얇게 썰어 밥 위어 얹어주던 덮밥 장수,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그 길엔 다양하고 근사한 음식 냄새로 가득 찼다. 난 홀린 듯 노점상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타오라이 캅?"(얼마예요?)
"하씹"(50밧)
"코쿤캅"(감사합니다.)

짧은 대화를 마친 내 손엔 팟타이가 들려있었다. 기숙사로 돌아와 샤워하고 에어컨을 틀고 책상에 앉아 호로록 한 입을 먹었다.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새콤달콤한 맛이 처음에 입을 간질거리다 이내 땅콩의 고소함이 어금니 사이로 퍼졌다. 땅콩의 딱딱한 질감이 사라진 뒤엔 쫀득한 면의 식감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마지막에 깔끔하게 입을 훑어주는 고수의 향까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들고 한숨을 뱉었다. "와…." 뜨거운 팟타이의 김이 입 밖으로 모락모락 새어 나왔다. 그 뒤로 그곳은 내 단골집이 되어 일요일이든, 목요일이든, 월요일이든 끼니때마다 찾아가게 됐다.


이 경험 이후 난 어느 도시를 가든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식당을 찾아간다. 그곳엔 여행객에게 친절한 메뉴판은 없으나, 그 나라 고유의 맛이 있다. 서비스가 훌륭하지도, 맛이 친숙하지도 않지만 내가 그런 식당을 찾아가는 이유는 그곳에서 끼니를 해결했던 기억은 귀국 후에도 꽤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여행에 맛이 있다면 이런 맛도 분명 존재하지 않을까. 혀로 느껴지는 맛 이외에도 그곳에 찾아가는 발걸음, 그 족적 하나하나에 담긴 여행의 맛. 그래서 난 앞으로도 꾸준히 현지의 낯선 식당 문을 두드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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