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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은새 Aug 04. 2024

강화가 겨울을 건넸다

250804

강화도는 겨울이 길었다. 일 년을 열두 개로 쪼개 책상에 놓아보면 그중 다섯 개는 새하얀 겨울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 칸 중 다섯 개는 여름이었고, 가을과 봄이 입맛을 다시며 하나씩 가졌다. 유난히 여름과 겨울이 길었던 곳, 강화도였다. 여행이라 얘기하기엔 우스운 일일 수 있겠지만 여행이 내 삶의 한 공간에 따뜻한 문장을 만드는 거라면 강화도에서 있었던 군 생활을 빼놓을 수 없다.


제초하고 돌아서면 금세 잡초가 자라나던 여름도 잊을 수 없지만 강화의 겨울은 더 특별했다.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한 매서운 추위였다. 가을이 접어들라치면 겨울이 벌컥 문을 열고 찾아왔다. 곳곳을 새하얗게 만들고, 꽁꽁 얼리며 세상의 시간을 늦췄다. 겨울의 한파가 가득 차면 막사 안의 세상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낙엽조차 자취를 감춘 앙상한 나뭇가지엔 외로움만 달랑거리고 있었고 철조망 너머로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던 산짐승도 보이지 않았다. 겨울이 시간마저, 공간마저 얼린 듯했다.

 

다만 우리의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우린 정시면 들어서는 기차처럼 매일 해가 뜨면 무언가를 만들고, 치우고, 훈련했다. 탄약고와 위병소 근무를 서고, 분리수거장을 정돈하고, 막사를 치웠다. 우린 그 고요한 공간을 채우는 유일한 생명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엔 한 명이 더 있었다. 위병소 앞에 누군가 간밤에 만들어둔 눈사람, 우린 만든이가 누군지 몰랐지만, 작품처럼 감상했다. 매일 하루가 지나면 눈사람엔 작자미상의 작품들이 더해졌다. 눈사람이 팔이 생겼다가, 배가 부풀고 머리가 커졌다가, 눈이 생겼다가, 넥타이가 생겼다. 매서운 겨울 칼바람을 뚫고 손을 호호 불며 새벽녘 누군가 어루만졌을 눈사람이 이 공간을 데워주는 듯했다. 나도 그랬다. 눈사람을 만질 때만큼은 온 세상이 따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사람은 사라졌다. 겨울이 지나 원래 있던 별로 돌아갔다. 떠나는 길 급히 떠난 모양인지 원래 자리엔 눈사람이 품고 있던 소지품들이 떨어져 있었다. 몇 밤이 지나고 소지품마저 사라졌고, 눈사람은 잊혔다. 그 시절 눈사람을 봤던 우리도 그 공간에서 사라질 것이다. 다시 그 공간은 또 다른 사람으로 채워질 것이고, 그들은 또 눈사람을 만들지 모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매년 돌아오는 반가운 계절처럼 우리도 사라지고 나타났다 반복하며 살아간다. 우리 계절 사이에 꺼내볼 수 있는 조그만 추억 하나쯤 가지고 있는 건 근사한 일이다. 그 시절을 달력이 아닌 기억으로 추억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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