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둘, 전역 뒤 다시 사회로 내던져진 난 바쁜 숨을 내쉬며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오전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일을 했고, 밤엔 영화관으로 출근했다. 일을 마치고 고기 냄새와 팝콘 냄새가 절인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행복했다. 그때 난 꿈이 있었고, 그걸 생각하면 노동만으로 점철된 현재가 마냥 힘들지만은 않았다. 그때 내 꿈은 히말라야에 가는 것이었다.
히말라야에 가고자 했던 이유는 답을 찾고 싶어서였다. 당시 대학생이던 난 목표가 없었다. 애당초 대학에 흥미를 갖고 들어온 게 아니었다. 그저 점수에 맞춰 대학에 가는 기조에 편승해서 대학에 갔으니까. 힘든 일을 하면 얻는 게 많고, 낯선 곳에 가면 시야가 넓어지니 힘들고 낯선 곳에 가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온 목적지가 히말라야였다. 난 몸을 혹사해서라도 이 지루한 고민을 매듭짓고 싶었다. 그렇게 네팔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했다.
네팔은 80년대의 우리나라처럼 남루하고 초라했다. 포장이 되지 않은 도로를 걷다 보면 흙먼지가 풀풀 날렸다. 먼지를 헤집고 다시 경비행기를 타고 루클라 공항에 내리자, 카트만두와는 다른 전경이 펼쳐졌다. 저 멀리 설산이 보였다. “저게 에베레스트, 그 옆에 있는 건 안나푸르나야.” 나를 도와줄 짐꾼, ‘사부’가 손을 뻗어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손끝엔 두 개의 설산이 장엄하게 우뚝 솟아올라 있었다.
준비를 마치고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됐다. 난 히말라야의 자연을 흠뻑 맞으며 발을 옮겼다. 허벅지가 땅기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몸에선 김이 모락모락 났다. 예부터 산과 가까웠던 셰르파 민족의 피가 흐르는 그는 나보다 왜소했지만, 산을 잘 탔다. 그는 늘 나를 앞질러 올라갔다.
“사부, 넌 어떻게 그렇게 산을 잘 타?”
-이건 아무것도 아냐. 작년에 난 8천 미터까지 올라갔었어.
“정말로? 거기는 환경이 혹독해서 숨도 잘 안 쉬어지고 그렇지 않나?
-여기보다 훨씬 더 춥고 가혹하지.
사부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대단한 일도 아무렇지 않게 담담히 얘기했다. 왠지 난 그의 그런 모습이 더 멋있어 보였다. 사부와 같은 셰르파 민족들은 산과 공존하며 살아갔다. 길이 험해 차나 기차, 비행기가 다닐 수 없는 이 길은 전적으로 운송을 인력과 당나귀에 의존했는데, 보통 셰르파들은 산을 타고 ‘로지’라 불리는 숙소에 생필품을 납품하고 삯을 받았다. 제 몸보다 더 큰 짐을 머리에 이고 아슬아슬한 산길을 묵묵히 오르는 그들을 보면 경외심이 들었다. 그들은 자기 모습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듯했다. 땀방울이 아름답게 빛났다.
산은 가까워질 듯 가까워지지 않았다. 인생도 이런 게 아닐까. 시지프 신화처럼 걷고, 또 걷는 것. 난 현실 속 시지프가 되어 산을 하염없이 올랐다. 그러다 해발고도가 4천 미터를 넘어가자, 고산증 증세가 나타났다. 증상이 나타나자 심한 무기력감에 빠졌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해가 떨어지면 체감온도도 영하 30도 밑으로 내려갔다. 컨디션이 굉장히 나빠졌다.
5천 미터가 넘어가자, 이번엔 생명과 땅이 변했다. 흙 대신 빙하로, 나무 대신 이끼로. 그리고 높은 고도로 낮아진 산소량 탓에 조금만 걸어도 헐떡헐떡 숨이 찼다. 아주 천천히, 힘겹게 발걸음을 뗐다. 그렇게 가길 몇 시간째, 마침내 칼라파타르가 눈앞에 다가왔다. 이미 수많은 사람이 스치고 간 이 돌무지엔 초대받지 않은 황량함만 가득했다. 세월과 강풍에 찢겨 나간 깃발이 펄럭이는 소리만 이곳을 채웠다. 난 잠시 눈을 감고 이곳을 탐닉했다. 인간의 영역이 아닌 듯한 영험한 기운이 감돌았다.
내려오는 길에 문득 날 스쳤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각자의 모습대로 살아가던 사람들. 난 그들의 땀방울을 떠올리며 내 모습대로 살아가자고 다짐했다. 당장은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뭐 어때. 방금 내가 밟고 있었던 칼라파타르, 고개를 들어 그곳을 한 번 쳐다봤다. 그러자 언젠가 찾을 거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몸에 스몄다. 청량한 히말라야 공기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짜릿한 소름이 팔뚝을 타고 온몸에 그대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