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당직 때 있었던 일이다. 승락이 형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그때 출동 벨이 울렸다. 가끔 출동 벨 소리 대신 신고자와 나누던 대화가 재생된 이후에 "화재 출동"이라고 방송되는 경우가 있다. 이번 출동의 경우가 이랬는데, 상황실과 신고자가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니 화재가 발생한 곳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난 저 녹취록을 들으며 구조 상황이 있음을 인지했다. 구조 버스에 도착하니 팀원들이 모두 뛰어오는 중이었다. 구조 버스는 사이렌을 울리며 출발했고, 우리는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방화복을 갈아입었다.
보통 화재 출동 현장으로 갈 때 방화복까진 착용하고 면체는 일단 착용하지 않는다. 면체를 착용하면 시야가 제한되기 때문에 현장 업무에 일부 제한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장을 한 번 살펴보고 팀장님의 지휘 아래 면체 착용이 필요한지, 불필요한지를 판단하고 그 상황에 맞게 적용한다. 그런데 이번 상황은 내가 들었을 때 '구조 대상자가 현장에 고립된 상태'였으니 바로 면체를 착용했다.건물 내부로 진입해야 할 확률이 컸기 때문이다. 난 검은 연기가 풀풀 나오고 있고 불이 붙어있는 현장 상황을 떠올렸다.
현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너무나도 멀쩡한 현장, 탄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신고가 나온 xx 아파트 102동 408호로 갔다. 계단을 걸어가는 중에도 화재 징후는 존재하지 않았다. 팀장님과 승락이 형님과 함께 현관문을 개방했다. 배척을 보조키 사선으로 대고 그 뒤를 망치로 내려쳤다. 조그만 틈 사이로 배척이 파고들며 보조키가 벌어졌다. 배척을 비틀어 힘을 주니 보조키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나갔다. 보조키가 지키고 있던 자리에 남아있던 부품을 강제 탈거하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내부를 확인하니 구조 대상자 한 명이 있었고, 집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고요한 거실엔 우물쭈물하고 있는 한 명이 서 있었다.
자초지종을 알고 보니 배달 음식을 시켰는데 배터리가 다 되어 도어록이 열리지 않자, 119에 전화해 불이 났는데 자신은 여기 갇혔다고 신고했다고 한다. 그렇게 119 대원이 문을 열면 자기가 배달 음식을 가지고 오면 되겠다는 일차원적인 생각을 하고 신고했다는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들었다. 소방관이 열쇠공으로 전락한 순간이었다. 허탈함에 힘이 쭉 빠졌다. 바깥은 30도가 넘는 땡볕이라 방화복을 입기만 해도 땀이 줄줄 나는 날씨였다. 내가 누군가를 도와주기 위해 조금이라도 바쁘게 방화복을 착용하고, 면체를 쓰고 계단을 오르던 모습이 의미 없게 비쳤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구조 대상자는 이전에 자해 경험도 있고, 정신적으로 불편한 분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어느 정도 수긍은 되었지만, 여전히 허탈한 마음은 조금 남아있었다. 심지어 이 출동 이후에 또 한 번 동일한 성격의 충돌을 나갔다. 술에 취한 할아버지가 불이 났다는 신고를 해서 출동했더니 방안엔 아무 화재 징후도 없었고, 그가 먹다 남긴 음식물과 술병만 있었을 뿐이었다. 이번엔 이유도 알고 싶지도 않아 구조 상황 없음만 확인한 뒤 그대로 팀원들과 구조 버스로 복귀했다.
내 땀방울이 필요한 곳에 닿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게 소비되는 내 모습은 언제든 환영이다. 허탈했지만 이런 날도 있다며 애써 삼켜 넘겼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