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에게 커피를 건넸다.
나는 ‘친절하네’라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이구나, 고마운 사람이구나.
그런데 누군가는 같은 상황에서 이렇게 말한다.
“왜 줬지?”
“뭘 시키려나 봐.”
“부탁하려고 미리 사주는 거야.”
나는 그걸 듣고 조금 놀랐다.
같은 커피 한 잔인데,
이렇게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어쩌면 해석은 받은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던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늘 경계했고,
누군가는 먼저 의심했고,
누군가는 그 의심을 자기 보호의 방식으로 살아왔겠지.
나는 한동안 내가 순진한 줄 알았다.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보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세상을 무조건 좋게 해석하는 것도 일종의 훈련이다.
나는 그 훈련을 하며 살아왔고,
가끔은 그 덕분에 덜 다치기도 했다.
그래서 커피를 받을 때마다,
나는 호의와 의심 사이에서 내 해석을 선택한다.
하지만 난 지금의 내가 좋다.
이게 행복이다.
- 서담, 세 번째 글 맺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