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 말처럼 되지는 않는다.
사람마다
에너지의 많고 적음이 다르다.
하루종일 소문을 듣고 다니며
또각거리는 5센티 굽높이 구두를 벗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은 소문의 조각조각을 퀼팅해서
자신의 유리점을 포착한 후에
무장하고 사람을 만난다.
그러나 우리들, 에너지가 작은 사람들은
내가 좋아하는 일, 최근에 푹 빠져든 취미가 있다면
거기에 열중한다. 그게 행복이다.
‘나도 에너지가 넘쳐 봤으면...‘이라고 중얼거려 봐도
혼자만의 시간이 충실하지 않으면
그마저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또다시 관심은 나에게로 향한다.
사람들의 마음이 어디로 흘러 가는지가 느껴진다.
왜냐 하면 마음이 가는 곳에 몸이 가기 때문이다.
사람이 몰려 있는 데가 목소리가 큰 곳이다.
간혹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서 돈을 사용할 수도 있다.
한편, 메이저에 끼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사람들의 마음이 내게로 오기는 커녕
눈길, 시선, 거기에 꽂힌 화살표가 각종으로 그려진다.
사람을 배제히면서도 한쪽 눈으로는 ‘주시’하였다가
나를 과녁으로 삼고 쏘겠다는 ‘나쁜 관심’들이
고조된다.
그런 ’관심’이 모여서
자신들 시각에서 불리한 점 한 톨 한 톨을
개인적으로 제출하라는 ‘불편 접수처‘에
개인마다 신고할 자유도 나름 활용한다.
‘이번에도 왕따인가?’ 하는 생각은
‘사건’의 트라우마 담지자인 내게 치명적으로
행동반경을 축소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기류는 물줄기가 정해진 만큼
안타깝지만 바뀔 수 없다고 판단된다.
‘이번 생엔 글른‘ 것이다.
언제나 도움의 의사와 조력의 손길은
약자에게 작디작지만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고 온다.
그것이 자기 책임을 나에게 돌리고
나를 자기 핑계로 쓰려고 마음 먹었던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심기를 거슬리는 셈이지만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이러나저러나 나는 망신을 한두번 더 당하는 격이지
‘관심‘에 추적당하노라면
어느새 소진이 온다.
‘내가 일 중독이었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보다 재미가 있어서 그렇게 했다고 기억한다.
내가 무엇에든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내가 그 일-무엇이든지, 직업, 부업, 취미, 연애, 커뮤니티 등등- 을 함으로써
너를 만나서
너를 알아서
너를 (일로서, 취미로서, 관심사로, 애인으로서...)
갖게 되어서
집단을 이끄는 운영진이 나와야 하고
운영진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그룹이 탄생한다.
거기에서 힘겨루기를 하고 살아남으려면 또
어디서나 비슷한 문제다. 변수는 정말 많지만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입을 다물고
혼자만의 시간을 활용하는 것이다.
나는 혼자서 내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묻기 시작했다. 저 왕따 ‘사건‘ 이후 참 다시 살기가 어려웠을 때
내 마음이 시키는 일- 그것은 대개 나를 즐겁게 하는 일이었는데 말이다.-, 그 일들을 하나하나 해 내면서
자신을 다시 쌓았다.
‘너 때문에 내가 못 했잖아!‘라는 마음이 든다면 나는 부끄러울 것이다.
어떤 결정도 내리기가 점점 쉽지 않아진다.
매번 그 어려움을 헤치는 방법은 ‘뭐가 중요한지?’를,
우선 순위를 마음 속에서 물어보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을 한 번에 취득하려고 하면
욕심만 가득하지, 뭐 하나 실제로 쌓여가질 않는다.
힘들었던 시간
‘관계’의 X축과 ‘내 실력‘이라는 문제의 Y축을 놓고
원래가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관계’는 그렇다 치고
그것이 아닌 ‘실력‘을 통제하는 변수는 훨씬 더 크게
내 자신에게 종속되었더란 것이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새해가 밝고도 열흘이 두 번 째다.
나는 오늘도 혼자서
내게 주어진 삶을 좀 즐겁게 살아가려고 하니
반기 들지 마시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