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높은 자존감으로 상황을 악화시켰죠.
일을 하면서 감정을 타는[Mix] 걸 보았다.
결국은 사람들을 움직이는 자기 권한에
푹 빠진 것 같았다.
권한은 곧 책임이라는 것을
이미 잊은 사람들이었다.
같이 있으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사람들.
내가 이 사람들과 같이 일하니
밖에서 보면 그 밥에 그 나물 이려니
똑같이 보겠구나 해서
물론 바뀌는 게 없었고
사방 벽에 부딪혔고
위를 비판하니까
옆엣사람부터 우수수 거리두기를 시작했음이
날이 가면서
팍 팍 와 닿았다.
박정호 교수가 유명 유튜버 채널에서
24년도 경제와 국가 정책 관련 설명을 하는데
중간에 어떤 언급을 한다.
내가 겪은 일의 핵심에 너무 가까워서
듣다가 돌아가서 다시 들어 봤다.
https://www.youtube.com/watch?v=
영상 32‘ 50“에서
박교수가 말하는 거다.
사건이 있기 전부터도 그랬는데
내가 하이라이트를 쳐서
의사소통하기 위해 가져간 공문서 요약지를
역시 손끝으로 밀어내면서
너(따위가 감히)는 빠져라 식으로 일관했던
과장의 전략이 알고보니 미국식이었네!?
언제 그런 걸 배웠지
(웃음.. 기막히다, 한숨)
알겠는데 그건 직장의 룰이 아니다.
잘 돌아간다면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정상이지만
비정상은 정상을 따돌리곤 한다.
과장이 계선 조직에서 바로 밑인 나와 말을 안하니
판이 갈리기 시작했다.
고립됐다는 걸 아는 데 걸린 시간은 짧았다.
아뭏든 빠르게 흘러가는 하루의 직장 생활에서
의견이 묻히고 그러자마자
딱 붙어 지낸 사람들이
순삭되는 경험은 희소하다.
왜냐하면 고립되선 살 수가 없는 게
우리 같은 조직 생활이면서
‘평생 한 직장’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민감하게 강자에 붙어
입을 다무는 게
철칙이기 때문이다.
어렸던 초창기 시절부터
직장에서 들은 노래는
이거였다.
“꼬리표를 달지 말아라.”
노래처럼 모두가 불렀다.
꼬리표 달리면 살아가기 힘들다고.
협조한다는 건 협업과는 달랐다.
일방적으로 따라가야 했고
알아도 모른 척 입을 다물어야 한다.
옳고 그름을 안다는 사람들이 나래비를 서지만
결코 ‘뒷말’을 즐기는 수준에 그친다.
찍히면 피곤하니까.
성향들이, 지향점이 고르게 맞춰지다 보니
내공만 있으면 자기 변화를 끝내 거부해도 살아남을 수가 있다.
나는 평생 직장에서 내공만 키워왔거든.
'혁신? 개나 물어가라 그래.
너 하나 고립시키는 것. 그거 내가 잘 하지.
나는 어떤 시험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으며
모든 형태의 너 따윈 알지도 못하는
굴욕을 견디고 살아남았으니까.
너 따위야 엄지손가락 하나만으로도
눌러 죽일 수 있어.'
라는 태세는
나 아닌 모든 이들을 ’침묵‘시켜서
과장에게 줄 서게 했다.
나는
그가 가진 ‘내공’이
올해에도 일을 또 엎을 거란 걸 알았고
자신이 최종 책임자란 걸 망각한
과장의 턱 없이 높은 자존감의
다른 이름이
그가 자주 입에 올린 자기 내공
이라는 걸
한심하게 바라봤다.
그의 가당치도 않으며 필요하지도 않게
높은 자존감이
나의 자존을 말살하는 걸
고스란히 당하는 일이
조직에서 아무 잘못 없이 고립된 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였다.
대신에 나는 찡찡거리지도
찔 찔 울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