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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한 사람 06화

사람을 좋아해 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사람’

- 기다려도 바뀔 것 같지가 않다.


나는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바로 운전을 시작했다.

취업 전에는 그렇게나 떨어지던 면허 실기 시험이

차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니

바로 주행시험에 붙으면서

끝났다.

집에서 근무지까지 가는 대중교통이 불편했기 때문에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집중력이 높아진 것 같다.


그 후로 많은 인생의 시간들을

차 안에서, 도로에서 보냈다.


사람의 심리가 묘한 것이로구나 생각한 시간이

그만큼이나 길었다.

가장 흔히는

주차 자리를 찾아 뱅글뱅글 돌고 있는데

시동을 걸고 있는 차가 나갈 듯 나갈 듯 나가지 않다가

내가 간신히 주차를 마칠 때쯤 고개를 돌려 보면

나가고 없는 것이다.


치과든 미용실이든

요즘은 다들 예약제라 시간을 맞춰 도착하려고 하면

그러다가 아뿔싸 늦고 마는데

이왕 볼일을 마치고 나갈 채비를 했으면

뻔히 눈앞에 차 세울 데를 찾고 있는 남도

좀 봐주면 안 될까 생각한 적 많다.


절대 사람은

내가 자신 때문에 ‘오늘 운 좋다!’고 생각하게

되는 일을

해 주려고 하지 않는다.



내 뇌를 속여 볼까



사람을 좋아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연애가 끊어진 적이 없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말조심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로 걸어가는 길은

가슴이 뛰곤 했다.

사람들 속에 둘러싸인 짧은 시간이

내겐 그들과의 접점을 갖는다는 설렘과

다른 습관, 성향, 배경,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앎으로써

다른 인생을 벤치마킹하는 기쁨을 주었더랬다.


‘전 사람에게 관심이 많아요!’라고 말하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고

남들은 왜 일만 하려고 하고

그러다가 별안간 달려들어 싸우는지

그러지 말고 긴히 소통을 하면

사람과 사람은 반드시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었다는 걸

이제 인정을 하고도 남는다.

살면서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내려 보고서

인정하게 된 것이지만 말이다.


사람에게 적극 다가가기도 예전보다 무서워진 것은

사실이고, 무엇보다 시도 때도 없는 자기 객관화가

밝고 맑은 톤을 자꾸 무너뜨린다.

‘저 사람이 보기에 내가 한심하겠지.‘

‘내가 뭘 하나 내세울 게 있는 사람이 못 되잖아.’

하면서

빠지라는 뱃살에는 일도 영향 없는 제 살 깎아먹기만 자동 발사된다.

그러면서도 요즘 궁리하는 것이

‘내 뇌를 그렇다면 속일 순 없을까?’이다.


나 상처받아 움푹 파인 살 없어요~

나 여전히 사람 좋아할 수 있어요~

나 내 경험치가 모든 것이라고 생각 안 해요~

나 전처럼 사람 잘 못 볼 일 없어요~


요렇게 말이다. 모종의 불안이 마음을 감쌀 때

아니겠지, 아니겠지 하면서 불안만 걷어 내고

힘만 좀 내 볼 수 있도록

내 뇌 속 여러 물질에게 주파수를 조정해 전달하는 것이다.


‘이게 될까? ’ 하는 생각이 들면 해 보면 된다.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 없다 ‘는 생각을

디퓨저로 뿜어 주고 말이다.

여기가 정말 최악이라고 생각했는데

더 최악이 있었음을 확인할 가능성도 없다곤 못 한다. 다만 작을 뿐이다.




사람을 사랑해 보면 아는 것들



여기서 ‘사랑‘은 모든 ’ 좋아함‘이다. 미리 말해 둔다.

사람을 좋아해 보면

내가 참게 된다.

사람을 좋아해 보면

자기 생각을 ‘아닌가?’ 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을 좋아하면

내가 하기 싫었던 일도

- 예컨대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먼저 나가서 차 빼놓기, 한 걸음 먼저 가서 청소해 놓기 그리고 가기 싫은 곳도 같이 가 주기, 시간과 자리를 마다하지 않기,

먼저 ‘사랑한다’ 말하기, 먼저 ‘미안하다’ 말하기, 타인을 의식하지 않기 등등이다. - 하게 된다.


거꾸로 사람을 사랑해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 먼저 ‘좋아한다.’ 말하지 않기, 자신의 시간을 정해

놓고 시간 되면 정리하고 일어서기, 어떤 서프라이즈도 하지 않기, 선물을 받긴 하되 뭐라고 하기, 자신의 어떤 행동 양식도 바꾸려 하지 않기, 변명도 사과도 할 줄 모르기 등등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늘 생을 살아갈 수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니 어떻게

좋고 들뜨고 몸이 스스로 일어나 움직이는 ‘칼날 위의 무당‘처럼

자기를 잊고

자기 몸무게를 느끼지 않고

백 살을 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백 년도

기약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 높은 자존감인지 자존심인지,

어쨌든 그 하늘 같은 마인드로만

버티다가 어느 날 무슨 사건이라도 생기면

스스로 채워지지 않는 온기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라도 달구는 법인데

누가 저를 위해 늘 추종하고 마냥 손을 들어주려고

자기 삶을 바치고 있지 않는다.

그것은 갓난아이의 입장이지

성인이 되면 진실되게 만나서 서로 대화하고

결을 나누고

곁을 내주면서

사랑해야 성숙해진다.


희생하고 내려놓음으로 자식을 키운 엄마의 마음이

사랑이요

‘저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구나.‘ 하며 관조하되

자신은 선 자리, 그 모습 그대로인 사람은

사랑할 줄은 모르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선택이 자기애와 다름이 없고

사람을 효용으로 구분하여

자기를 불구덩이 속에 벼리어

자신을 위한 호미를 만들어 오는 사람을 방관하고

나중엔 호미를 뺏고 사람을 버릴 사람이다.

그 사람도 사람이 맞는가는

기준에 따라 다르게 볼 문제이다.


내가 사람에게 잘해 주고

만난 인연을

최소한 ‘인연‘, 맥시멈으로는 ‘운명‘으로 여겨

푹 빠져 보고 사랑해 보고 알게 된 바이다.



시인의 시를 읽고도



몸의 근육이 뭉침으로 고생들을 해 보신 분은 안다.

마음이 섭섭하고 실망하고 다친 데 또 다쳐서 뭉치면

그건 정말 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똑같은 사람이 여러 번 다치게 할 수도 있고

여러 명의 사람이 번갈아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시인의 시를 읽고도

이게 뭐야 하는 사람이 다치게 한 쪽일 텐데


여기서 인용하고 싶은,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은

시인 이병률 님 시이다.


시집 앞표지 사진(이병률, 문학과 지성사, 2024년)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앞에서 주책맞게도 배고파한 적

기차역에서 울어 본 적

...(중략)...

매일매일 햇살이 짧고 당신이 부족했던 적

...(중략)...

한 사람을 모방하고 열렬히 동의했던 적

...(중략)...

마침내 당신과 떠나간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을

영원을 붙잡았던 적


외람되지만 중략을 넣었다.


시인의 시를 읽고서 눈을 지그시 감는 분은

저 마음이 되어 본 사람일 것이다.

시를 보았으나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고

멀뚱멀뚱 거리는 분은

아마도,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일 것 같다.

남의 눈물이 고인 사랑,

기다림과 설렘이 자기 뇌피셜인 것만 같아서

몸부림친 자의 고백과 호소를 동반한 사랑,

그런 사랑이다.


그런 사랑을 받고도 주지 않은 사람은

자본금이 너무 쌓인 투자자와 같다.

이제 아끼지 말고 투자를 하시라.


내가 아니어도 좋다.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서

사람의 향기를 맡을 수가 없어서다.

나는 그 모두가 인간미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남을 위해 몇 초 먼저 시동을 걸어 차를 빼놓고

채비해서 출차하는 ‘인간미‘, 그런 것.


때는 봄이 오고 있고

자기 보따리를 끌어안고 풀지 못한 사랑이 있다면

마저 풀 때이다.

계절은 쉬이 가고 인생의 봄도 역시 짧더라는 말을 들었다.


기다리면 오는 사람인지, 기다려서 될 일인지

빠르고도 정확한 판단, 그 정도는

품을 팔고 나서

’ 사랑‘이란 공임을 받을 일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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