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자리... ‘그것’.이.
남의 물건을 건드리지 않는 나라 사람들은
우리와 일본 정도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파트 엘리베이터 버튼 위에는
‘O00호 문 앞에서 택배 물건 가져가신 분
도로 가져다 놓지 않으면 큰일 날 ‘ 거라는
손글씨 경고장이 붙어 있다.
‘경찰 수사 중’이라는 무시무시한 말과 함께.
왜 가져갔을까?
도로 갖다 놓았을까? 그 누군가는..?
한 며칠간을 엘리베이터 탈 때마다 생각한 것 같다.
내게도 택배 시킬 일이 종종 있다.
내 것은 없어지지 않고 문 앞에서 나를 잘 기다려 준다.
그런데 한 삼일을 내가 택배를 뜯지 않고
우리 집만의 위치에다가 택배를 쟁여 두고 있다.
지나칠 때마다 ‘택배 뜯어야지?‘라고
마음의 소리가 울려도 또 지나치고 지나치고...
3월 역시 저녁이면 피곤해지고
그러 저런 일상을 꾸려 가고 있는 이유로
택배는 시켰는데 뜯어서 챙겨 넣을 일이
까마득해 보이는 것이 하나요,
다른 하나는
커피든, 저 안에 든 무엇이든
아직 기존의 쓰던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있어서이다.
사람은 어떻게든 ‘할 일을 미루는 ‘심리를 갖고 있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마침 내가 본 테드 강연들 중에서
‘할 일을 미루는 사람의 심리‘(팀 어번, 2016년 2월)가 그런 내용이었다.
미루는 데도 한정이 있기 마련.
자기가 하려던 일, 해야겠다고 결심한 일에
착수하지 않기 위해
사람은 익숙한 모든 일을 더 잘 하는 데에
시간을 쏟고 어쩌면 몰두하곤 한다.
물건이 아직 쓸 게 남아 있고
내릴 원두가 아직 남아 있다면 더욱이 미룬다.
저 택배 상자 안에서 새로이 튀어나올
아이들이 아니더라도 당장 먹고살 수가 있다면
그렇다. 할 수 있는 한 택배 정리를 미루고 싶어지는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있었을 때이다.
그가 정신을 잘 차리지 못하는 나를 보고 한 말이,
왠지 힘이 나기도 하고 힘이 빠지기도 하는 말이었다.
그 후로도 여러 ‘시작‘을 해 보고 나서
나는 어떤 시작이든 잘 준비된 상태여야 한단 생각을
굳히게 됐다. 셋업(Set up)이 아무튼 좋아야 한다.
어떤 지인은 해외여행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날
비즈니스와 여행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고
자축하다가 늦게 잠든 고로
그만 탑승할 항공편을 놓쳤다고 하는 얘기를 했다.
나처럼 해외를 십 년 가야 한 번 나갈까 말까 한
사람에겐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싶어도
시작을 반이라고 말한 그는
나의 ‘한 사람‘이었다.
‘한 사람’이다라고 쓰고 싶었지만
즉, 출발조차 하지 않았다.
나와의 모든 과정을
함께 했던 것이다.
커피가 떨어져 보면
새로운 커피를 영접하는 마음이
절실해지고 새 커피의 갓 볶은 향이 코끝에 아린다.
그리고 아무도
이전 커피와 갓 도착한 커피를 함께 갈아서 내리지
않는다. 그러고 싶지가 않게 된다, 사랑한다면.
한동안 건강상 이유로
카페인을 금해야 했던 나는
커피메이커를 눈앞에서 모두 치워 놓았었다.
닦아서 잘 싸고 보이지 않는 곳에 ‘안치’하는 과정에서
건강의 소중함을 생각했고
다시 하루 한두 잔의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었을 때
마음이 뛰어놀았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하면서도
좋아하는 커피를 다시 만나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일을 모두 되찾기 위해
좋아했던 감각과 몰입하는 순간을 잃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이 악물고 참고 기다렸다.
그리고 체력이 절반은 페이스를 찾았을 무렵
결국 ‘한 사람‘을 떠나보내게 되었다.
그 무렵에 나는
생각하는
기준과 저마다의 균형점이 다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뼈마디마디가 여러 번, 으스러진 듯 느껴져서
그것은 어쩌면 ‘한 사람’의 일생이 내게 와서
알려 준 ‘행복한 우연 속에 숨겨진 원칙’(’ 우리가 운명이라고 불렀던 것들‘, 슈테판 클라인, 29쪽)이
아닌가 한다.
살아가기, 계속하여 사랑하며 살아가기가
진정 무서운 이유다.
준비되지 않은 자가 무대에 오르는 것.
아직 입에 담지 않았으면 좋겠다.
곁을 떠나는 이들이 대중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울어 본 사람이 우는 이를 알아본다.
나 자신,
아무도 알아줄 수 없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심정이 되어 봤던 것 같다.
‘고독‘이란 두 글자가 온 머리를 꽉 채우고
다만 눈물만이
눈물이 나인지, 내가 눈물인지 모르게
줄을 이어 흘러내렸다.
언제든 무심히 살다 보면 낭패를 보는 법이다.
한 사람이 내 인생에 와서 ’한 사람‘이 되어 가는가
했더니
나의 존재가, 나의 인생이란 것이 이렇게도
보잘것없어야 하느냐고 주먹을 쥐어 본들
어쩔 수가 없다.
허공에 주먹질을 하는 사람만큼 바보스러운 것도 없다.
설명해 보라고 해 봐야
이미 인간의 기억은 흐려지고 뒤섞였다.
“도대체 내게 왜 왔었냐?”라고 하며 멱살을 잡는다면
이미 법륜 스님이 ‘인간관계가 피고 지는 것‘에
너무 그렇게 연연하지 말라고 금지해 두셨다.
그래서 우리, 살아있는 우리는
‘사랑‘을 끝낼 것인가.
사랑의 이면이 너무도 헛헛한 걸
탓할 것인가?
‘(월간) 과학동아’를 우연히 대기하던 병원의 잡지꽂이에서 꺼내 읽다가 사진으로 찍어 왔다.
사진 속에 설명이 있다.
‘Ooo'님을 호명하는 소리에 그만 놓고 일어나다 보니
몇 월호인지 확인을 못 했다.
누워 있는 발레리나도
무대 위로 올라가면 멋진 발레리나이다.
우리가 지금 누워서 못 일어날 것 같지만
누워 있는 과정도 발레의 한 과정이다.
나의 사랑할 연습, ‘발레‘를 위한 최종 연습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완전히 끝나지 않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
나의 마음 ‘빈자리‘를 확인했다면
그것을 채우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반대로 마음이 꽉 차 있다면, 어떤 궁지에 몰려 있다면
일단 누워도 보고
눈으로만, 마음속으로만
‘발레’를 해 보자. 시뮬레이션은 몇 번이라도!
아직 누워 있어야 할, 준비되지 않은 발레리나가
어영부영 무대에 오른다면 그것은
‘설명하려 할수록 설명할 수 없는 불행‘(위 책, 슈테판 클라인, 30쪽)이 될 것이다.
무대 위의 다른 파트너들에게도,
무대를 기다린 관객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