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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스틱 짙게 바르고 Mar 06. 2024

20. 입을 삐죽이며 조르르 달려가 일러버린

- 어른이 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가득.



어른이 되면 일르지 않는다



아이들은 어른을 보고

언제 저렇게 될 수 있을까 ?’ 생각할지 모른다.  

길에서 어른을 만나면

그래서 인사를 한다.

아이에게 부모는 너무 크고

만능인에 가깝다.

학교 다닐 때는

학교 선생님이 그다지도 대단해 보였던 것처럼.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내가 이거 이거는 잘 모르고 ..”등등을

설명하기 전에

아이는 다 자라서 ‘어른’ 소리를 듣고

어른으로 살아간다.

알아서 하기 시작한다.

일르지 않고.



부자의 담벼락에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으면



그렇다면 마음이 영 편치 않을 것 같다.

내가 만약 부자라면.


우리 사회는 부단히 불균형과 비대칭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다룰 만한 문제로 만들 방법을 찾는다.


개개인의 마음은 어떨까.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옆에 있으면

안정감을 느낀다.

만약 비슷하지 않으면?

돌출된다면?

그럼 몹시 불편해 한다.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는 집단일수록이

불편함을 시시각각 드러내고 만다.

나는 오랫동안

자신이 하는 일이 마냥 '힘들다.'고 말하는

나조차 이해되지 않는 집단에 속해 왔다.

왜 그러지? 돈 받고 일하잖나

무료 봉사가 아니라고.

그 돈이 많든지 적든지는 별개의 문제고.


힘들게 일하는 사람마저 정작 극소수다.

오랫동안 유유상종하면서

별 실적을 기대하지 않는 조직에

나 자신 몸 담아 왔으면서도,


늘 피해자 의식을 갖고

일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 사람들 속에 있다 보니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흔히 ‘별종’으로 간주되고 다수에게 배척당한다.

그게 나라고는 내 입으로 말하지 않겠다.


힘들게 일한다고 해도 격려나 인정은 바랄 수 없다.

나처럼 속도를 내려고 자기 목소리를 높힌다면

언젠가는 기총소사의 표적이 될 것은 자명하다.


자신과 비슷한 속성, 비슷한 성향,

비슷하게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면

나도 그들 옆에 붙어서

밥도 같이 먹고 어울려 이야기하면서

하하호호 하는

조직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직이 원래 존재하는 목적이

하하호호 그들이 즐거운 생활을 하는 것

자체와는 먼 것임에도.


나는 우리가 대하는 민원인의

가장 낮은 층위에 속한

가장 말없고 무력한 그 작은 사람

만족하고 행복해 할 때라야

공무를 집행한다는 우리의 일이

제대로 굴러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가장 낮은 데까지 손도 대지 못했고

따라서 혜택이 미치지 않았다.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퍼트리는 것은

자칫 남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 된다.


우리 조직에는 공식적인 근무평가 외에는

실적에 의한 보상이나 승진 심사 제도가 없다.


위 두 가지를 감안하면

뒷말을 잘 해서 메인스트림이 되곤 하는

현실을 캐치할 수 있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에 대해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쇄신하는

방향으로 가는 경로는 폐쇄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밀실에서의 담합에 의한

불공정한 카르텔

강고하게 형성되어 있다.

작게는 단위기관에서 크게는 거대한 상급기관의

내부 정치가 그렇게 이루어진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이 아직도 횡행한다.


사람을 판단할 때에는

자신의 기준을 들이밀 것이 아니라

대상이 되는 그 사람의 상황과 조건에

포커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수많은 조직 내 근무자들의

기호와 색깔이 모두 다른 데도

무던히 맞춰 갈 수 있었던 것은

내 관점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그가 누구인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는

그 당사자에게 물어야지

왜, 보는 나의 감정을 기준으로 하지?


반대로 나를 카르텔의 힘으로

배척하고 밀어버린 조직의 사람들은

나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나의 상황이 아닌

저마다 자신이 가진 호불호, 옳고그름이라는

잣대를 들이댔다.

그러다 보니 모두가 모두의 이유로 

나를 부정한 것이다.





까마귀는 까맣다.



일본에 가면 까마귀가 많다고 들었는데

요즘은 우리의 도시 한복판에서도

유유히 날아 앉는 걸 본다.

까마귀를 보면 일단 놀란다.

왜냐하면 정말 까맣기 때문이다.

그냥 까맣기만 하다

이름이 까마귀라서인가.


A는 무척이나 자기 자원을 잘 활용했다.

치고빠진다고 하는데 그는 둘 다 하지 않았다.

남의 주장에 그때그때 고개를 까딱이는

행동 패턴을 보였다.

그의 업무 방식에 비판적인 의견을

질문 형식으로 보낸 뒤였다.

나는 A가 나에게 찾아오거나

메신저 등으로 해명할 거라 생각했으나

결과는 전혀 아니었다.


A는 당시 조직 내 영향력을 자처하던  B에게

조르르 달려가 일러 바쳤다.

내가 자신을 공격했다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매우 공식적인 회의석상에서였다.

B가 일어서서 자신의 ‘영향력’을 자신하는 투로

“A를 괴롭힌 사람-나인 것 같았다-은

공식 사과를 하라.“고 한 것이다.


나는 어이가 없었고 그러나 나서지 않았다.

그때 나는 아직, B와 같은 눈으로

기관 내부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계산이 안 섰다.

‘적을 만들지 말라고 했는데 ... ’라면서

주저하는 동안 회의는 끝나 있었다


A는 영리하게도 자신의 잘못을 빠져나간 뒤 

나의 많은 적을 양산시키는 방법을 썼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A와 같은

회피적이면서 유아적인 타입의 인간상이 먹히는

이 조직에 대해 이해나 공감을 잘 하지 않는다.

‘A들'이 많아지는 세상에서

더 살아갈 일이 염려스러울 뿐이다.

확신에 가깝게 나는 A는 바뀌지 않고

잘 살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까마귀는 비둘기가 되지 않는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도

명백한 ‘가해’



C는 어린시절 가정 문제로

힘들고 우울한 날을 보냈다.

C는 누구에게도 그 시절이 있었단 말을 하지 않는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그런 그는 익숙한 환경을 선호하는 경향이 크다.

바로 힘들고 어려웠던 성장기에 자주 갔던 곳이다.

그 사이 수많은 이사를 다녔지만

항상 그 곳을 가서 일을 처리하고 목적을 달성한다.

나는 그런 C에게 별달리

환경의 변화를 꾀하란 말을 하지 않는다.

마음이 편안하면 됐지

그 무슨 다른 비용과 당위를 잴 수 있는가.


어쨌든 나는 조만간 확실하게 낫거나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A와 같은 이를 만나지 않게

모든 일에서 멀찍이 떨어졌으며


C가 어릴 적 상처를 달래주던 곳,

거리를 불문하고 달려가는 장소가 있는 것 같이

마음이 편안한 곳에서라면 할 수 있던 것들을

나는 더 많이 찾고 추앙한다.


'밥 드셨어요?', ‘저랑 같이 식사하러 가실래요?'

와 같은 일상적인 대화가

사람을 얼마나 편안하게 하는지

내가 ‘빼앗긴 봄’이 다시 왔다.


그것을 제한하고 저희들끼리의 연합으로

사람을 고립시킨

마음이 까마귀 색깔인 그들

얼마나 삶을 고단하게 바꿔놓았는지 !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면서

사람의 자취를 지워버린 자들

조직을 배경으로

자신의 사적 이익을 집적하고, 

말을 돌리고,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땅에 묻은 그들,


그들은 개개인의 만족을 위해

다른 사람의 안위를 파괴하였다는 점에서

사실은 살인을 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사회적으로 죽어 있는’ 나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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