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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스틱 짙게 바르고 Aug 18. 2024

68. 뒤돌아보면 힘들지 !

- 한 방울 두 방울 땀인지 눈물인지?


또 코로나.”다.

공휴일이라서 꽤 먼 곳까지 탐문을 했는데 5:5다.

병원이 문을 안 열었던지, 미어 터지던지.


코로나의 성격상 ‘내가 언제 어디서 걸렸지?’를 묻는 일은 하지 않는다. 알면 뭐해? 이미 아픈데!


어디선가 쓱 나타나 얼굴을 내미는 반가운(?) 얼굴이

반가와하긴 너무 오래 됐다 싶다. 이미 잊을 만 했다.


코로나도 그렇지만

또 가느다랗고 작디작아서 빠져 버리고도 찾는다는 일조차 하지 않은 바늘 하나가 어느날엔가

방바닥에 누워서 ‘나 여기 있었지~’ 할 때도 그랬다.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것이다.


사람들 누구나 오랜 시간 들여다 보지 않아서

이젠 정말 다시 얼굴을 마주 한다는 생각부터가 어색하다 싶으면 만나지 않고 서서히 서로를 잊어 본 적 있을 것이다. 어쩌면 세월이 흘러서 좀 잊혀지는 것 또한 사람에 대한 예의일지 모른다.

세월이 이만큼 지나서도 그냥 그 자리에 서 있는 건

‘망부석’ 뿐이어야 한다. 하물며 악연이었음에랴.





내가 했던 말이 결국은 부메랑이 되어



직접 그렇게 물어 본 적은 없었으나 ‘I'는 그 무렵 자신의 인생에서 최대 고비를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I'에게 말하곤 했었다.

시인 류시화의 산문 일부이자 책 제목인 그 말을.

다들 짐작하시게도 그것은 바로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IMF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분들은 대개

그 ‘국가 부도’ 사태의 직격탄을 자신의 가계가, 자신의 사업체가 정면으로 맞은 분들일 것이다.

마치 한 번의 사인으로 자신과 자기 가족의 안위를

친구나 지인 빚 보증에 태워 버린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텐데...

사건이 일어나기 전으로 자신이-의식이- 자꾸 되돌아 간다는 것이 가장 고통스럽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니까. 아무리 의식적으로 되돌아 가서 ‘그 날 그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무한 반복해도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그 때 말할 것이다. 뒤돌아 보지 말라고.

쉽지 않은 일이다. 괴로움에 빠질수록 더 그 일이 있기 전으로 가면 황홀에 빠지는 법. ‘연대 보증을 서명하지만 않았더라면...’이라 생각하면서 앉은자리에서 둘러보는 우리집 살림살이가 ‘가압류 딱지’ 뒤에서

더 환하게 빛나는 법이다.

그만큼 다시 비참에 빠진 나에게로 돌아오기는,

현실을 자각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말은 다시 주워 담기 어렵다.’고들 한다.

말이 무서운 것은 또 하나,

‘부메랑’이 되어 내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일부러, 힘들라고, 죽으라고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는

처음 ‘분위기가 수상하다.’라고 느꼈을 때가 아니라

모든 왕따가 진행되고 난 후, 정신이 든 다음이었다.

바로 과장과 그를 용인한 무리들이 내게 ‘일부러’ 그렇게 대했다는 사실이 가장 힘들게 했다.

지하철에서 남의 발 위에 내 신발을 올리고도 우리가 ‘용인’받는 이유는 하나다.

일부러 밟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바로 ‘익스큐즈 미’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가. 사람들이 직장 내에서 그들끼리 계획을 짜고

한 사람을 닦아세워서 결국 일을 빼앗고...

이런 스토리가 가장 조악한 이유는 무엇일까?

피해자로서 내가 파악할 진대, ‘일부러’ 그들이 내가 ‘아프라고’, ‘아파 한 끝에 차라리 죽자고 마음 먹으라고’ 그렇게 휘몰아친 것이라는

‘의도’와 ‘목적’ 때문이다.


그게 제일 빠져나오기 어려운 감정의 터널을 만든다.


어떻게든지 재발과 후유증이 없어야겠다는 생각에

집중하려고 한다. 맡은 일의 최소한만 해 내려 한다.


‘순살 아파트’, ‘순살 의대’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처럼 나는 ‘있어야 할 것이 쏙 빠져 버린 채’  

거적문에 돌쩌귀’*를 단 듯 살아가면서

일상을 하나 하나 ‘킬’해 가는 현실이다.


* 거적문에 돌쩌귀: 제격에 맞지 않거나 전혀 어울리지 않음을 뜻하는 속담.


그러니 뭐가 희망이고 뭐가 좋겠는가.

‘날아가는 새가 뒤를 돌아보면 목이 젖혀서 죽을 수도 있지.’라는 생각을

심란한 날, 울렁거리는 날. 모든 날에

자전거를 타면서 했다. 자전거도,

타면서 뒤돌아 보았다간 고꾸라질 수 있다.






모든 물이 물방울이 되는 날까지



아시다시피 기운이 많지가 않다.

왕따 피해로 커리어는 날아 갔고

원래 근육질이 아닌 몸은 각종 시도로 삭신이 쑤신다.

한 주간 두 회의 글 발행을 누르는

내 손이 나를 잡아서 계속 끌고 가고 있을 뿐

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왕따 가해자들 얼굴이 생생하고

그 면면 자체가 잊히지 않아서

깎아 먹는 날이 많다.


다른 건 늘- 물건 어디다 두었는지, 뱅킹 암호는 뭘로 해 두었는지- 헷갈리고 잊어 먹으면서도

그 일들은 ‘치매’ 영향을 좀처럼 안 받는다.


‘내가 이걸 해서 되겠어?’ 또는

‘이제 와서 한단들 뭐 하겠어?’,

‘그냥 편히 살아~’ 이런 마음의 유혹을

지금처럼 아프거나

지금처럼 혼자라고 느낄 때면 진짜 많이 받는다.


너무 힘들다고 느낄 때

살려고,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고 서칭을 한다.

딱 걸렸다!

오늘은 표면장력이다!


https://m.blog.naver.com/with_msip/221880699587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는 말은 ’세상 진리‘라고 난 생각한다. 결국 ‘필요’에 의해서 하지 않던 일에 착수하고 가지 않은 길이 닦인다.

아무리 해도 침체되고 우울한 감정에 지배되는 날,

‘내 땀 눈물’의 가치가 폄하됨을 느끼고

정신력이 한 땀 한 땀 공그르기에 찔려 버리던 날

또 찾아 올 것이다.

그렇다 치고 이제 ‘표면 장력’의 힘을 믿자.

물이 모여서 물방울이 된다.


지금 땀 흘리고 눈물을 쏟지만 언젠가 머지 않은 날에 꿈이 이루어진다. 흐르고 쏟긴 땀 눈물이 모여서 방울이 되고 막을 이루며 나를 지탱할 힘으로 바뀔 것이다.

조금만 참자.

더디게 낫더라도 결국은 낫게 될 것을 믿자.


사람 죽으라고 염불 왼 그들보다야! 잘 살자!

내가 살려고 한 모든 노오력이 그게 정답일 게야.

옛 말에 또 있잖아.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그러니 살게 되겠지. 모든 물이 물방울이 되는 날,

나도 사는 날이 올 거야.

손수건이 다 해어지도록 흘린 땀과 범벅이 된 눈물이

무가치한 것은 아냐.

아무렴 과장 보다야 그 누구 보다야 비교해서 내가 더 나을 바 없을 수 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내가 내 삶을 잘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가급적 완전히 다른 모형으로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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