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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스틱 짙게 바르고 Aug 21. 2024

69. 아무 말도 못한 이를 위한 랩소디

-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책을 읽고 다시 생각을 모으고 글을 쓰려고 하면

어느덧 '오늘'이 되곤 한다.

글 발행을 눌러야 하는 '오늘' 말이다.

하긴 무더위에도 비가 오면 조금 센치*하다.


*센치: 센티멘털(sentimental)을 줄여서 쓰는 말.

약간 감상에 빠진 느낌을 생각하면 된다.


'L'이 퇴근 무렵 전화를 걸어 왔다.

나는 막 메일 발신을 누르려고 하는 중이어서

작성된 내용을 확인하면서 가만가만 통화를 했다.

"브런치 글쓰기를 계속 하고 있냐?"고 물어 왔다.

내가 '중심이자 실재'인 다른 인물들에게는 미처 보내 주지 않았지만

'L'에 관한 내용을 담아 올린 글은

본인에게 보내 준 적이 있었다.

바로 이 글이었다.


https://brunch.co.kr/@dff3dd9acfae4f7/16





추락하면 못 날아요?


'L'은 저와 같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후

긴 시간 고통을 내리 겪어야 했다.

그냥 여기저기가 아파 본 사람

그 어떤 사건이 어떤 타이틀을 갖고

내 멘탈과 감정을 누르는지 알 수가 있다.

'내가 왜 그랬을까?' 타이틀 하나와,

'왜 하필 내게 그런 일이 있었을까?' 타이틀

하나, 그 정도겠다.


그 단단함은 어마어마하다. 북극의 어린, 일년 차나

이년 차 얼음 정도에는 비할 수가 없다.

뭐랄까, 한 사람의 인생을 가두고 있는

바다 얼음(해빙)이 되다시피 영구적으로 보일 정도다.

본인이 마음 먹은 대로 그 사건을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들어내고 일어날 수가 없다는 면이 그렇다.


'L'은 '무엇을 할 수 있다'라는 영역과 관련된 자존이 최근까지 수면 하로 내려와 버린 듯 하다.

그는 나에게 "우린 추락했잖아?!"라고 전화상으로 말했다.

나는 되받았다. "추락하면 못 날아요?"


우린 사이가 좋다. 과거 함께 근무하면서

서로를 지켜봤었고 일에 대한 열정이 크다라는 면에서 공감 퍽 된다.

'L'이 겪은 일의 유래와 내막을 물론 나는 잘 알고 있다.

들어서 아는 일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

'L'이 세상 누구보다 고독했던 지난 시간

나는 내 일처럼 여기고 살아간다.





말하지 않은 말이 진짜 '마음'.


내가 글을 계속 쓴다는 일을 언급하면서 

'L' 나를 추켜 올려 주었다. 고맙게도!

그날 밤 다른 글을 보았다고 카톡을 보내 왔다.

'L' 언급한 것은 이 글이었다.


https://brunch.co.kr/@dff3dd9acfae4f7/43


나는 말하지 않았다.

43번 번호가 붙은 저 글을 쓸 때 내가 'L' 염두했었다는 말을 말이다.


나는 사람을 죽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사람을 죽인 사람들이 "내가 죽였어요."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들 중에 어떤 경우는 이럴 것인데,

나는 그들이-내가 이 좁은 '판'(world)에서 누구 누구인지를 다 아는 그들이다-  

'여기에 내가 너랑 같이 있는 이유를 모르겠거든. 네가 없어져 줬으면 좋겠는데?'라는 마음으로 사실은 아주 멀쩡한* 'L'을 내보냈다는 것을 안다.


*멀쩡하다 : 흠이 없고 아주 온전하다.


생각이 달랐다. 그건 당연하다.

아니 하물며 부부라고 해도 얼마나 다른 생각을 갖고 한 집에 사는지를 말을 꼭 해야 아나? 아니다.

배경이 달랐다. 어쩔 수 없다.

서로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거기 가고 싶어 간 것

아니고 거기만 학교도 아니었다.

그 곳에 다닐 때 나도 그들이 저렇게 뭉쳐서 어처구니 없이 몰려 다니는 모습을 보게 될 줄 상상도 못 했다.


경쟁이 심했다. 다 눈칫밥을 먹고 다닌다.

한 치라도 더 나은 자리에서, 좀 더 편하게 내 위주로 익숙한 일만 하면서 줄을 섰다가, 좀 더 남들에게 번듯해 보이는 다음 자리로 가기 위한 경쟁은 비단 조선

시대 관직 투쟁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우리끼리도 이런데 하물며’ 라면서

하나의 도시, 하나의 나라 안에서 어떻게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상생하고 상호존중하며,

하물며 ‘이해까지’ 할 수 있는지 미래 그 가능성에 대해서 뿌옇게 흐린 전망을 하곤 했었다.


'L'이나 나나 '말을 못 하는 성격'이었다. 남을 위해서는 말을 잘 한다. 싸워서 이겨 줄 만큼씩은 한다.

그런데 나한테 들어오는 견제와 방해에 대해서는

그만큼을 못 했다. 왜 그랬는지 답답한 노릇이다.


나는 최근 코로나가 지나갔다. '역시 면역력은 무시 못 할 일'이라는 생각을 확인하고 갔다.

자, 당신이 병원에서 여러 진단을 받는다고 하자.

그럴 일이 없길 바라지만.

그럼 가장 먼저 무슨 생각이 드는가?

오로지 진단된 질병에서 탈출하고 싶고, 건강했으면 하는 바램 밖에 없다.


중환자실에 누워서 '내 자본 이익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라고 뇌까리는 사람은 일단 없다고 본다.

뭘 생각하나? '어서 나아서 집으로 돌아가야지!''내가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이거다.

나는 코로나 검사를 기다리는 병원에서 한 가지만

생각했다. '코로나 아니어야 되는데.'라고.


그런데 '말을 못 하는 사람'인데

아프기까지 하면

그 때 들어오는 '훅'을 어떻게 막을까?

못 막았다. 정답이다.

'L'은 그렇게 아픈데 얻어맞기까지 한 자신을

그후로도 오랫 동안 되돌아보는 시간만 보내고 있다.






성찰은 그들이 했어야,
하든 안 하든, 알 바 아님


이 글을 통해 나는 'L'의 상처가 아물고, 자신이 '소중한 것들을 아직 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길 바란다.


성찰을 하지 않아도 잘 사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누구인지도 안다.

그러나 그들이 한 일에도 어느덧 /이자/는 붙어 있다.

때마침 정부가 금리를 인상하도록 은행과 모종의 방법을 강구하고 있으니 그 예를 들어 보자.

물가가 인플레이션 되고 시중에 돈은 갈수록 늘어난다. 돈 값인 금리는 계속 올라갈 것이다.

이 때 불어난 금리만큼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이자/를

나는 '내가 나를 위해 하지 않은 일'이라고

이름 하려고 한다.

이렇게 해서 'L'이 자신의 상처를 이리저리 돌보는

시간 역시 /이자/가 붙었다.


이제 높은 금리가 다가오고, 다시 말해서 만약 인생의 불황이 재차 온다면

우리는 자기 상처를 /통행증/ 삼아 무사 통과할 수 없다.

'나는 한 번 상처 입었으니 더이상 상처 받지 않겠다.'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내 말은, 정말로 많은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다.

그 시간 동안 내가 나에게 한 일은

 '/모순과 극복의 정반합/ 퍼레이드'가

다였을지 모른다.

조금 나아졌다가 다시 아프곤 하는 일들.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면 넘어진 김에 쉬어가자고 짐짓 쓰러진 날들.

내 아픔의 크기만 주시하고 보낸 시간.


세상은 볼 때마다 놀랍게 변하는 동안 그렇게,  

나는 아프기만, 그러기만 했던 것이 아닐까.



중요한 열쇠는 내게 있다.



다음번에 'L' 만나서 이야기하게 된다면 결국 잘

사는 사람들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 나눴으면 한다.


특징 하나: 충분히 내가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
특징 둘: 새로운 일을 찾아서 떠나는 여정에 나서는 것.
특징 셋: (이게 어려운데) 나의 행복을 다른 사람의 행복 크기와 절대 비교하지 말고, 내 행복을 키우는 데 집중하는 것.


사람을 다 죽게 만든 그들이 물론 잘못을 했다.

오죽하면 '인간도 아니'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의자를 빼 버리고

뒤에서 조롱하는 일들은

역사적으로 늘 있어 왔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내야 할 이자를

키울 것이다.

문제는, 골탕을 먹은 뒤에 내가 나한테 하지

않은 일들이다.

과연 어느 것이 경중이 큰가.

시간이 흐르고 나면 내가 나를 위해 한 일들이 나를 가장 잘 치유할 수 있고, 사실은 그 방법 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반대로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다른 '넘어지고 쓰러진 사람들'보다

물리적으로 늦게 일어나서 늦게 길을 닦아 간 데 대한 높은 비용을 내야 할 것이다.


옆지기는 내게 따라붙으면서 말하곤 한다.

“사람들은 자기한테 별 관심이 없어."

그렇다.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렇게 나를 골라 내든지, 솎아 내든지를 하고 싶어서 심야에도 쑥덕공론했던 그들이지만,

정작 내가 눈 앞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은 나를 잊었다.

간혹 호의를 표했던 사람들도 덩달아 나를 잊었다.

사람들은 편한 대로 살아 간다.

힘들고 울렁거리는 나나,

아직도 자신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이 잘 사는 것을 생각하는 데 머물러 있는  정작 'L'을 본인들은 잊었다.

잊어버리는 것이 그들이 살기에 편하니까

잊는 것이다.

이런 세상인데, 그런데 나도 나한테 관심이 없다?


그럼 결국에 잘 살아갈 수가 없다.

나는 어느덧,

'내가 나를 위해/나한테 해 주지 않은 일의

대가가 그들이 나를 따돌린 일들의 대가보다 크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젠 정말 'L'의 상처가 다 아물었으면 좋겠다.

이젠 그가 오직 자신의 두 발을 믿고, 두 눈의 눈물을 닦았으면 한다. 그랬으면 좋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uUPDoJo_v1M

조용필도 좋은데 오늘은 박정현 목소리로 들어본다.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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