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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k split Jun 30. 2020

비행기 타는 남자

해외 입양

해외 입양이라는 용어가 신문이나 방송이 아닌 현실세계에서 내게 다가온 때는 신입 승무원 2년차 정도였을때라 여겨집니다.

'해외 입양' 이라는 용어를 접하는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6•25 전쟁 후 부모를 잃은 고아들의 해외 입양을 떠 올릴것입니다.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기구한 팔가 떠오르고, 막연히 고달픈 인생을 살것이며, 마음속으로는 동정과 연민을 가지는게 보통 대한민국 사람들의 경우 일겁니다.


비교적 긴 체류 시간이 보장되는 20년도 더된 어느 날, 스위스 쮜리히에 도착항 다음날,관광지 투어도 하고 시내 관광도 할수 있는 여유있는 스케줄이었습니다.

승무원 생활이 점점 익숙해지면서 남승무원의 행복(?^^)을 느끼던 중이었습니다.

남자인 제가 그것도 혼자서 10명에 가까운 비교적 (^^ㅋㅋ) 상당한 미모의 여 승무원들을 이끌고 시내 투어를 한다는 것은 힘들지만 남자의 자존감을 극대로 끌어올리는 일이었습니다.

주로 앞장서서 길을 묻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쇼핑몰을 함께 돌아 다니는 솔직히 고된 일이었지만 ,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저에게는 일생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즐거움의 순간이었습니다.


어느정도 시내 투어가 끝나고 호텔로 귀가해야 할 시점에 모두가 허기를 느껴 피자를 먹기로 했습니다.

시내 어느 번화가에 있는 피자집을 향해 우리는 유럽의 추위를 실감하며 종종걸음으로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녀를 만나게 된 순간이 바로 그때였습니다.


당시 막 시작된 한국인들의 유럽 관광 붐으로 시내 이곳 저곳에서는 한국인 관광객을 쉽게 볼수 있었으나 유럽 현지에서 일을 하는 한국 사람은 만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입사전 혼자 유럽 배낭 여행을 할때도 한국인보다 일본인 배낭 여행족이 더 많았기에 아직 유럽에 있어서한국이라는 나라가  낯선 나라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메뉴를 정하고 종업원을 불렀는데 영어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프랑스 파리에서도 영어가 어느정도 통하게 되었지만 20년 전에는 유럽에서 영어가 그다지 유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 영어를 알아듣지 못한 그 종업원은 잠시 기다리라는 제스쳐를 하더니 잠시 후 한쪽 구석에서 피자집 유니폼을 입고 식사를 하던 동양인 종업원을 데려 왔습니다.


" 한국인 이세요?" 하는 내 질문에 그녀는

" Yes" 라고 짤막하게 대답했고  한국어는 못하고 영어는 조금 한다고 했습니다.

영어로 주문을 끝내고 잠시후 음식이 하나씩 나올때마다 나는 그녀와 여러가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녀의 말에 의하면 다섯살이 안되어서 언니와 함께 이곳 스위스로 입양 되었고 고등학교 졸업이후 대학에 입학하여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한다는 것이었다.

입양 이후 그날처럼 많은 한국인을 본건 처음이었고, 한국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지만 관심은 많다고 하였습니다.

21살의 그녀는 수려한 외모와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 입양이라는 단어를 듣게 된 나는 이상하게도 이성적인 호감보다 동생처럼 여겨지면서 연민이 느껴졌습니다.


그녀는 상냥하게 웃으면 우리에게 다가워 친절하게 서비스 해 주었고 결국 우리 모두는 그녀를 위해 다소 근거없는 연민의 감정으로 팁을 주자는 어리석은 배려를 하였습니다.

그녀는 팁을 정중하게 사양하면서도 웃으면서 우리와의 만남을 고맙게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배낭여행에서 만난 여러사람과 펜팔을 했던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펜팔을 제의 했고 이후 3년 정도를 편지를 주고 받았습니다.


혹자는 이 얘기를 하면 내가 무슨 흑심을 품지 않았냐고 따지기도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녀는 내게 이성의 호감이 아닌 잃어버린 동생같은 연민으로 다가왔습니다.(동생이 없지만^^)

한국에 대해 궁금해 했던 그녀에게 한국 관련 엽서를 보내기도 하고 대중 음악 CD 나 전통음악 CD 등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자연적으로 연락이 끊긴 그녀는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요?

해외 입양이라고 하면 우히는 막연한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을 대하는 경향이 있것 같습니다.

옛날부터 정이 많았던 우리나라 사람,...저 역시 한국 사람인지라 명확하진 않지만 그녀에 대한 동정심 내지 연민을 가지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비행을 하는동안  해외 입양을 가는 아이들을 여러번 경험하면서 마음속에는 그들을 버린 부모에 대한 원망 내지 분노와 그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함께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쩌면 다행일 경우도 많다는 것을 알게되어 연민보다 격려를 해주는 마음이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의대를 준비하던 당시의 그녀는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요?

아마 전문 직업인으로서 잘,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을까요?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되어 있었더라면 그녀와의 만남이 지금까지도 이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사람의 노력만으로 되는것이 아님을 알수 있을것 같습니다.


해외 입양된 아이들중 많은 이가 자라오는 과정에서 정체성의 문제로 힘들어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과거란 잊어서는 안되지만 과거에만 묻혀 살아서도 안됩니다.


그녀나이 지금쯤 40중반...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알수 없고 궁금하지만 그녀 자신의 운명이었던 해외입양의 아픈 기을 대물림 하지 않았을꺼라 믿습니다.


세상의 모든 입양아 분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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