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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k split Jul 03. 2020

비행기 타는 남자

멋쟁이 할머니들 (RED HAT SOCIETY )

몇 년 전 애틀랜타의 체류 호텔에서 정말 멋있는 할머니들을 만났다.

빨간 모자에 보라색 원피스 또는 보라색 치마를 입고 계시던 할머니들...수백명의 멋쟁이 할머니들이 호텔 로비를 장악하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단체 이름은 바로 ' 레드 햇 소사이어티)...


당시에는 그 단체의 결성 목적이나 활동 등에 대해서 전혀 몰랐고, 호텔 로비에서의 만남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단체 이름을 알게 되었다.


검색 내용에 의하면 50세 이상의 할머니들이 주기적으로 한 장소를 정해 미국 각지에서 모여 일정기간 동안 그 지역을 여럿이서 몰려다니거나, 수다를 떨거나 하면서 회원 간의 친목을 다지는 단체라는 것이다.

그러한 정기적인 모임과 친목 활동을 통해 젊은 시절의 감성을 다시 회복하게 만들고,  나이가 들면서 느낄 수 있는 소외감을 잊어버리는 것을 보니 정말 멋있는 할머니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점점 고령화되어가 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서 한번 정 생각해 볼 모델이지 않나 싶다.


그 할머니들의 공통점은 열정과 에너지가 넘친다는 것이다.

모임에 참석하는 할머니들의 숫자도 상상을 초월했다.

미국 각지에서 모여들기 시작하여 호텔에 투숙하 세미나를 열고 모임에 걸맞는 행사를 개최하는 등, 할머니들의 모임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엄청났다.

호텔 로비 전체뿐만 아니라 지하 1층에 있는 세미나 구역까지  점령한 그 할머니들의 수다 소음은 마치 관중으로 꽉 찬 야구장이나 축구장 소음에 맞먹을 정도였다.


이름 그대로 모든 할머니들이 화려하고 우아한 빨간 모자를 쓰고 보라색 원피스 또는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내 눈에는 어색하거나 촌스럽지가 않았고 멋있어 보였다.

그 나이에 그렇게 화려하게 치장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들의 표정이나 분위기는 즐거움 그 자체였다.


브리핑을 위해 모여있던 우리 승무원들은 적당한 자리가 없어 한쪽 구석에 서서 모여 있었는데, 승무원들의 이쁜 유니폼이 그들 할머니들의 시선을 단숨에 끌어들였다.

여기저기서 할머니 여러분이 모여들면서 우리 승무원들을 보며 연신 '뷰티플~~' 을 외쳐 대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을 좀체 즐겨보지 못했던 승무원들은 그냥 웃고있었다.( 여승무원들은 이쁘다는 소리는 많이 듣지만 그것을 즐기지는 못하는 것 같음 ㅎㅎ)


마침 그 상황을 인지한 친화력 ''을 자랑하는 내가 가만있을 수 없어서 그들 중 한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 Exvuse me,  is there  anything that I can do for you?"...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할머니는 승무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나 역시 그런 별한 복장의 멋있는 할머니들과의 만남을 간직하고 싶어서 팀 승무원들에게 의향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모두 좋다고 하여 우리는 몇몇 할머니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문제는 이후에 발생하였다.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신 여러 할머니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면서 자기들도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사진을 찍으시면서도 다양한 포즈와 익살스러운 표정..감히 우리의 할머니들에게서는 상상도 못 할 모습을 보여주셨다.

심지어 어떤 분은 찍은 사진을 자녀들에게 자랑할 거라면서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셨다.


그 분위기에 압도된 우리는 결국 브리핑을 비행기에서 하기로 하고, 난데없이 국적기 승무원으로서의 아름답고 품위 있는 모습을 미국 전역에서 오신 할머니들을 위해 사진에 남겨드렸다는 자부심에 걸음마저 우아하게 걷게 되었다.

비교적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머니 몇 분과 나누었는데, 그분들은 특별한 목적으로 모이기보다는 정기적으로 모여서 함께 늙어가는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하면서 수다를 떨고, 미국이라는 넓은 땅떵어리에 흩어져 있는 어릴 적 친구도 만나고, 남들이 볼 땐 나이에 걸맞지 않은 크고 빨간 우아한 모자와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옛적의 열정과 즐거움을 찾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모임을 하고 집으로 가면 늙은이로서의 외로움과 소외감은 느껴지지 않고 , 건강하고 활기차게 다음 모임의 시간과 장소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외로움을 잊고 언제든 연락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행복해한다는 것이다.

나름 체계도 있어서 각 지역별로 소모임이 있고, 소모임의 리더가 가장 큰 모자를 써야 하며 지역 간의 메신저 역할을 하 봉사활동과 사회적 이슈에 대한 관심도 표명하기도 한다고 하셨다.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지금의 우리 할머니들과 사뭇 다르다는 느낌과 함께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임이나 단체고 하면 뭔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거창하게 사회 봉사 활동을 하거나 정치적 이슈에 동참하는 경향이 강한 우리나라와는 달리 , 그저 모여서 인생을 이야기하고 건강을 이야기하고 만남을 이야기하고 그리움을 이기하며 며칠을 함께 보낸다니...그것도 빨간 모자에 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할머니들...


멋있게 나이 드는 법을 그들은 그렇게 실천하고 있었다.

한동안 그 할머니들의 당당함과 수다스러움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평생을 자식 바라지에 힘 써시다가 이제는 손주들 육아에 내몰린 우리들의 어머니와 할머니들에게 일 년에 단 며칠만이라도 이쁜 옷 입게 하시고 수다를 떨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평생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님이 수다를 떠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간간히 크게 웃기도 하시고 노래도 흥얼거리기도 하셨지만 미국의 그 할머니들처럼 전국을 돌아다니며 빨간 모자와 보라색 원피스의 에너지를 발산하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과연 나라면 그들처럼 할 수가 있을까?

그들과 비슷한 나이에 가까워지는 내가 그들처럼 빨간 모자나 보라색 원피스는 아닐지라도 어릴 때 즐겨 입었던 멜빵바지를 다시 입을 수 있을까?

수다는 아니더라도 친구들과 함께 몰려다니며 예전처럼 놀 수 있을까?

할머니들의 열정과 에너지에 부러움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문득 그런 할머니들과 같은 삶과는 전혀 동떨어진 인생을 살아오신 어머님과 할머님이 생각난다.

평생 소박한 한복만 입고 사셨던 할머니와 변변한 양장 한벌도 없이 수다는커녕 묵묵한 웃음만을 입고 살아오신 어머니...

지금 살아 계신 면 늦게나마 빨간 모자 하나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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