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jack split
Aug 13. 2020
비행기 타는 남자
희망을 보는 者 절망을 보는 者 경계에 서 있는 者
당신은 어느 쪽에 가깝습니까?
상황이나 사건을 보는 관점에 따라 우리는 보는 방향이 다릅니다.
희망적으로 보느냐 절망적으로 보느냐는 순전히 개인적 성향입니다.
하지만 그 성향의 영향력은 작지 않습니다.
각각의 관점에 따라 장단점은 있겠지만 자신의 성향을 알고 일이나 사건에 대응하는 것은 현명한 행동 일 수밖에 없습니다.
난 당연히 희망적 관점으로 일이나 상황을 판단하고 대처합니다.
그러다 보니 걱정보다 기대가 앞섭니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의심보다 믿음과 신뢰를 먼저 갖게 됩니다.
갈등은 사라지고 서로 간에 협력과 조화가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믿음과 신뢰에 실망을 안기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기대와는 반대되는 결과로 마음에 작은 상처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심기 일전하여 좀 더 객관적이며 신중하게 변하리라 다짐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허허 하고 웃고 있는 나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또한 희망을 보는 사람들의 단점은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다 보니 어느 순간 자기만족으로 변질되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교만으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그러다 자기가 만든 희망적 상황에 빠져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 시간만 탓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절망적으로 상황을 보는 게 더 낫다고 말하고 싶진 않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희망과 절망이 주는 영향력 중 더 큰 영향력을 가지는 것이 절망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바뀐 환경이나 상황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먼저 발현한다고 합니다.
특히 리더가 없거나 리더의 역량이 부족한 경우에는 집단적인 두려움에 휩싸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그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조직의 위기를 자초합니다.
절망을 보는 사람들의 단점은 상황이나 사건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반전이나 극복의 타이밍을 놓치기 쉽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볼 때도 부정적 경향이 강합니다.
지위에 따른 상명하복식의 언행이나 행동을 하고 업무에 대한 철저함을 기하다 보니 구성원 간의 갈등과 불만을 유발하는데 정작 본인들은 자신의 업무에 대해서는 완벽한 존재라고 믿고 있습니다.
조직을 위한다는 겉포장 안에 자신만의 이익이나 미래에 집착하는 모습이 뚜렷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도 우리는 희망 아니면 절망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이젠 이 두 선택의 중간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경계에 서서 이쪽저쪽을 바라보며 올바른 선택을 저울질할 수 있는 경륜이 생긴 것 같습니다.
아직 완벽하다고 할 순 없지만 경계에 올라서는 두려움을 감당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경계에 서서 상황을 보거나 사건에 대응한다는 것은 선택을 위한 적절한 타이밍을 찾고 상황에 맞는 대응 전략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경험과 믿음을 바탕으로 자신에게 베팅하는 사람을 경계에 선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성향의 사람 중에 누가 옳고 그런지는 감히 말할 순 없습니다.
공자 맹자를 믿든 노자 장자를 믿든 틀린 건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은 다음 올바른 판단을 위해 두 경계의 담장 위에 서서 이 끝과 저 끝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아주 지혜롭거나 똑똑하지는 않아도 현명할 수는 있을 겁니다.
비가 오고 천둥이 쳐도 놀라지 않는 담담함과 햇볕이 내리쬐는 날에도 쉽게 뜰 뜨지 않는 신중함을 갖추기만 하면 높은 담장으로 된 경계에 서서도 두렵지 않을 겁니다.
불확실성은 늘 존재했습니다.
코로나 역시 불확실성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시간에 휘둘리지 않고 해야 할 일에 집중하면 곧 선택의 시간이 옵니다.
그 순간 다만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