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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영우 Dec 26. 2020

블라디에서 하바롭스크역까지


새벽기차

   

새벽에 잠시 눈을 떴는데 여전히 열차는 말없이 달리고 있다. 참으로 특별한 경험이다. 그리고 이 열차는 또 말없이 우리를 이르쿠츠크까지 데려다 줄 것이다. 학교와 일터에서 그리고 집에서 서로 다른 기대로 다투고 실망하고, 다시 사랑하고 그렇게 이겨내기를 반복했던 우리들. 이렇게 무작정 떠나 서로 의지해 나가는 특별한 경험은 우리를 더욱 단단한 가족으로 엮어줄 게 틀림없다.    


머나먼 이국의 땅, 칠흑 같은 어둠만이 내 눈을 응시한다. 잠시 나타났다 금세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회백색 자작나무 줄기가 환영처럼 명멸하는 심연의 세계다. 열차 티켓에는 우리가 내릴 종착지가 적혀 있지만 지금은 아무 생각 않기로 한다. 그저 흐릿한 전등 빛에 어려 있는 내 사람들을 보며 시베리아 평원 속으로 영원히 빠져들고픈 평온한 잠을 청한다.   

 

적응하면 세상 제일 편한 횡단열차, 내 자리



바젬스카야(vyazemskaya) 역의 햇살    


아침햇살이 눈부시다. 새벽녘 어디쯤 3분 정도씩 두어 번 멈췄던 열차가 처음으로 15분 이상 머물렀다. 연어알과 생선절임구이를 파는 상인들이 보인다. 현지 특산품이라고 한다. 바젬스카야(vyazemskaya) 역이다. 아, 이런 방식이구나. 먹을 게 떨어질 걸 대비해 역에 정차할 때마다 상인들을 만나 조금씩 사두는 방법 말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열차는 마지막 모스크바 역까지 60개가 넘는 역을 거친다고 한다. 짧으면 짧은 대로, 길면 또 긴 대로 오르고 내리는 일주일 동안 이 차디찬 대륙을 따스하게 안아온 민초들을 다 만날 수 있다니, 이것도 참 특별한 경험일 것 같다. 바이칼 호수로 들어가기 위해 이르쿠츠크 역에서 내려야 하는 게 어쩌면 아쉽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처럼, 열차에서의 사육 생활도 이렇게 적응해 가는구나 싶다. 더욱 편안해진 마음으로 시베리아의 햇살을 사진에 마음껏 담아 본다.        




베르티옹, 본젤라또보다 맛있는  

  

하바롭스크(khabarovsk) 역은 확실히 컸다. 40분이나 정차한 곳이라 처음으로 역사 밖 광장까지 나가보았다. 한 소녀가 아이스크림을 팔았다. 멀리 떠나왔다 해서 태윤이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내 손을 붙잡고 그쪽으로 벼락 같이 나를 인도한다. 이미 입을 다시고 있는 태윤이에게 그녀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아이스크림을 내 준다. 어쩌면 생계의 모든 것일지도 모를 작은 리어카 앞에서 일에 몰두하는 푸른 눈의 아이. 무표정한 진지함이 예뻐 보인다.    

적응이 되어 가니 바로 러시아 홀릭이다. 그러나 결론은, 프랑스에서건 이탈리아에서건 아이스크림은 언제나 달콤하다는 사실이다. 달달한 걸 혀로 빠는 아이의 표정을 보며 어느새 내 마음도 달콤해졌다. 


하바롭스크 역에서는 40분 정차하니 밖으로 나갔다 오기 좋다.
하바롭스크역 노점. 러시아 아이스크림은 어떤 것을 골라도 맛있다. 연유가 좋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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