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새벽부터 그러더니 오늘따라 유난히 가다서다 하는 일이 잦다. 시간을 재보니 확실한 연착이었다. 걱정되는 게 당연했다. 무려 3시간이나 늦어졌기 때문이다. 이 페이스라면 우리 식구가 내리는 이르쿠츠크에서는 현지 시각으로 새벽 2시를 훌쩍 넘긴다. 아, 저 아이들을 데리고 당장 잠자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럴 때는 아내와의 협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역 안에 짐만 맡기고 간단히 잠을 잘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난 반대였다. 며칠째 제대로 씻지 못했는데 그냥 잠만 자야 한다니, 말도 안 돼!
들어보니 이곳 사람들은 연착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자주 있는 일이란다. 한국 같았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여하튼 그곳은 택시 타기도 위험하다는데 결국 집중력을 발휘해 막심 어플로 현지에서 안전한 택시 타기를 연마해 본다. 그런데 열차 안에서는 데이터는커녕 와이파이도 잘 터지지 않는다. 역을 지나갈 때 잠시 신호가 좋다가도 시베리아 평원으로 나아가면 금세 불통이 되고 만다. 부디 우리 열차가 더 빨리 달려주기를 바랄 뿐이다. 파블로비치(pavlovich) 역에서 사온 치킨을 안주로 소주를 들이키며 고대했다. 필요할 것 같아 챙겨온 소주가 이럴 때는 최고의 친구다.
치타(chita) 역에 내렸다. 오전 6시30분, 아직은 모두 잠들어 있을 시각이다. 그런데 혹시나 싶어 계산해 봤더니 연착 시간이 상당히 단축된 게 아닌가! 50분 정도까지 따라잡은 상황이었다. 연착이 잦다 하니 그냥 넘어갈 줄 알았는데 열차의 상태를 바로잡고 머무는 역마다 조금씩 시간을 단축해가며 밤새 달렸나 보다. 겨우 며칠이었지만 무뚝뚝한 표정의 러시아인들에게 느낀 것은 보이든 보이지 않든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원래 시베리아의 의미는 '빈 땅'이다. 사실상 버려진 땅이란 말인데 이처럼 광활한 땅을 영토로 하면서도 여전히 세계적 열강을 유지하고 있는 데는 러시아인들의 저런 특성이 작용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들은 어디를 가나 자기를 비춰줄 태양을 찾고 태양을 향하려는 마음이 매우 뿌리 깊게 박혀 있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말하자면 중심을 향하는 러시아 사람들의 구심력적 세계관이다. 이것은 오랫동안 지속된 전제권력이나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역사를 가능케 한 사상적 토대이기도 했다. 이 시베리아횡단열차의 건설 역사도 마찬가지다. 불가능에 도전한 러시아의 힘이었다.
이렇게 되니 저 무표정들이 이제 더 이상 예사롭게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