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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영우 Jun 20. 2020

도시락 싸는 남자

코로나가 알려준 내 인생의 '도시락'들


나는 오늘도 일어나자마자 도시락을 싼다.

이른 아침 가장 먼저 집을 나서는 아내의 도시락이다. 그가 출근 채비를 서두르는 동안 나는 부엌으로 간다. 일 분 일 초가 총알 같이 흐르는 시간엔 바로 넣을 수 있는 반찬이 소중하다. 한 달씩 눅여 놓아도 짭조름한 맛을 내는 깻잎 장아찌가 가까이 있구나. 좋다, 너부터 담아 줄게. 질겅질겅 씹으면 갓 지은 밥 몇 술도 금방 넘어가는 매콤 달콤 진미채 볶음도 그렇다. 묶음으로 사놓은 아삭한 포장 김은 차라리 사랑이다.



그래도 따끈따끈한 반찬이 들어가야 도시락을 싸는 예의라 할 수 있지. 달구어진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잘게 채 썬 감자와 당근을 볶아 낸다. 소금과 후추로 간을 맞춰 반찬통의 마지막 칸을 채워 내면 바야흐로 도시락의 완성. 조금 부족하다 싶으면 어제 집 앞 텃밭에서 따다 놓은 상추와 쌈장을 포일에 싸 넣는 것도 잊지 않는다.





고등학교로 출근하는 아내의 도시락을 싸준 지도 벌써 석 달째. 춘삼월이 왔지만 피어야 할 꽃 대신 코로나가 발화하여 두어 달 동안 학생 없는 학교를 지켜야 했다. 학교 급식실도 문을 닫았으니 알아서 끼니를 책임져야 할 교사들. 룰루랄라 식당을 찾을 수도 있으나 제 건강보다 학생의 안전이 염려되어 쉬 그럴 수 없다. 집에서고 직장이고 쉴 만하면 울리는 방역당국의 사회적 거리두기 문자는 사실, 식당은 안 된다, 네 혼자 먹어라, 먹어라, 알겠냐의 시그널이었으니 도시락 말고는 대안이 없었던 셈이다.



그래서 나는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비단 아내의 것뿐만이 아니다. 아내가 출근한 후에는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의 도시락이 또 나를 기다린다. 단 아내와는 용도가 다르다. 학교가 아니라 집에서 먹일 도시락이다. 온라인 개학일 때나, 2부제니 격일 제니 하며 들쑥날쑥한 등교가 이어지는 요즘도 점심밥은 꼭 집에 와서 먹도록 한다. 아직은 급식실에서 촘촘히 줄 지어 밥을 받아 오밀조밀하게 먹을 때는 아니라고 여겨서다.



사실은 처음부터 아이들의 도시락을 싼 건 아니다. 출근하면서는 점심으로 밥과 반찬을 준비해 놓았으니 꼭 챙겨 먹으라고 몇 번이나 강조해도 혼자 남은 애들은 항상 거르거나 라면을 끓여 먹기일 쑤였다. 안 되겠다 싶어 준비한 비책이 곧 도시락이었다. 다행히도 아이들의 마음을 붙잡았나 보다.





큰 아이에게는 몇 해 전 교토에 가서 사 온 '광부 도시락'통을, 작은 아이에겐 그가 좋아하는 '레고 도시락'통을 준비했다. 집에 와서 무슨 반찬이 있을까 기대하며 열어 보는 재미가 있는 모양이다. 첫날, 너무 맛있게 먹었다고 말해 주는 아이들이 고마웠다. 그러나 이내 걱정이 밀려왔다.

잘할 줄 아는 건 계란말이밖에 없는데. 토마토케첩 바른 비엔나소시지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조금씩 메뉴를 바꿔 가는 게 쉽지 않은데 말이야 하면서.





이제는 삼십 년도 더 지난 학창 시절, 도시락을 싸던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매일 점심과 저녁, 두 개의 도시락을 싸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매일 같이 햄이나 고기볶음 같은 반찬이 올라왔다. 남들 앞에서 자식의 기를 꺾지 않으려던 마음이 아니었을까.

중학교 때 짝이었던 친구가 있었다. 그 시절은 여러 친구들끼리 반찬을 나눠먹기도 했는데 그 친구의 반찬은 너무 싱거워 아무도 손을 안 댔다. 그래서 점심 때면 그는 항상 혼자 밥을 먹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친구는 신장병을 앓고 있었고, 그의 엄마는 수년 동안 소금 간이 없는 도시락을 싸면서 그런 아들의 건강을 지켜야 했던 것이다. 잠시나마 그를 멀리 했던 일이 미안했고 부끄러웠다. 지금 그 친구는 건강을 되찾았을까.



따지고 보니 신혼 시절에도 나는 도시락을 싸 다녔다. 매일 같이 점심값 내기가 버거울 때다. 가진 게 없던 그 시절의 도시락은 경제였다. 계란구이, 계란말이, 계란탕, 계란찜, 간장에 버무린 계란 비빔밥. 인생은,  아니 반찬은 허구한 날 계란이었지만 그래도 맛있었다.



아, 학생운동으로 수배생활을 할 때도 도시락은 항상 내 곁에 있었구나. 경찰들의 추적을 피해 대학 안에서 기거했던 나날이었다. 당시 애인은 집에서 지은 밥을 1년 365일 싸 들고 내가 있는 은신처로 몰래 찾아왔다. 대학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나에게 그 도시락은 일종의 자유였다. 애인의 엄마는 딸이 가져간 그 도시락이 수배자를 위한 것이었단 사실을 알고 계셨을까. 아마 알고도 모른 척하지 않으셨을지.



오늘 아침에도 나는 네 번째 도시락을 쌌다. 마지막 도시락은 나를 위한 것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을 퍼서 담고, 정성스럽게 말아 예쁘게 다져 넣은 계란말이의 비주얼에 흡족해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떠올려 본다. 아직도 다 큰 아들의 밥을 걱정하며 어젯밤 방풍나물 무침과 깨로 쪄낸 참기름을 건네다 주시는 엄마. 그런 엄마가 싸 준 도시락으로 교사 생활을 하셨을,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 신장병을 앓던 자식의 싱거운 반찬에 마음 아팠을 친구의 어머니도 괜스레 떠오르는구나. 곱게 키운 딸이 집 밥으로 도시락을 싸던 걸 지켜보셨을 나의 장모님. 더 이상 뵐 수 없는 세계로 멀리 떠나셨기에 그저 그 마음만 아련히 새겨 볼 뿐이다.



나는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도시락을 싸는 일은 인생을 싸는 일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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