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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Dec 20. 2018

세련, 자기 연민

생각편의점


세련, 자기 연민



 

야생에서는 자기 연민(Self-pity)을 볼 수 없다고 쓴 D.H. 로렌스의 *시엔 덧붙일 게 없어 보인다. 인간은 야생의 엄연(儼然)만큼 명쾌하고 처연(凄然)만큼 싸늘한 서사를 흉내 내지 못한다. 못된 진화의 결과라고 본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애정을 담은 시선으로 그의 시를 음미하면, 자기 연민이 없다면 세련된 인간이 되기는 글렀다는 것으로 읽힌다. 

우리는 <세련미>라는 말까지 갖고 세련을 일종의 권력처럼 즐기지만, 달리 보면, 인간의 삶이 그만큼 피곤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 그대에게 세련되었다고 할 때에도 그는 경멸을 담을 수 있다. 여타 동물과 달리 우리가 가진 세련은 야생성이 순화되었다는 의미로 쓸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때로는 세태와의 영합을 고민하며 살아온 삶에 대한 위로이기도 하겠는데, 행여 비난을 끼워 넣어도 뭐랄 수 없겠다. (물론 대개는 진정한 경멸은 아니라고 보는데, 순수하게 경멸이 섞여있다면, 자신의 야성을 자랑하기 위한 밑밥으로 삼는 것에 불과하므로 마음의 상처를 받을 일은 아니라고 본다.)  


야생은 인류가 버린 생이다. 다행인 것은 조금 남겨 놓은 야생 가운데 사랑도 포함된 것이다. 가슴을 조이는, 뭔지 모르는 절박과 함께 찾아오는 달콤한 감정과 절절한 그리움들과 마주친 세련은 거추장스럽다. 

"겹겹이 가면을 쓰고 나대다가, 결국 다 벗어버리고 나니 사랑이 남더라"

이런 야생 예찬론은 있어도, 사랑에 빠진 이들이 세련된 사랑을 해서 인간이 즐길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을 가졌다는 이야기는 없다. 말하자면, 원래 그대의 날 얼굴, 즉 민낯에 사랑이나 사랑스러움이 쓰여있는 법이다. 화장 가운데 가장 좋은 화장이 전혀 화장하지 않은 듯한 화장이듯이,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다시 말해 야생을 추구하는 <사회적 동물>이 된 것에 별다른 자기모순을 느끼지 않은지 한참 됐다. 


한 마디 더 붙이면, 그대가 사랑으로 다치는 것에 그대의 세련됨이 한몫을 하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Self-pity, D.H. Lawrence


I never saw a wild thing 
sorry for itself. 
A small bird will drop frozen dead from a bough
without ever having felt sorry for itself. 


자신을 측은해하는 야생은

전혀 본 적이 없다.

겨울 나뭇가지 위 작은 새, 얼어 죽어 떨어질 때라도

저 자신을 동정하지는 않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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