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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Jul 22. 2020

매혹 4

매혹 4




내 안에 객체로 들어온 그를

훼손하거나 잃지 않는 한,

그가 좋아하는 것을

나는 말릴 생각이 없고,

오히려 그래야 한다고

여기고 있지만, 그는

공연 등, 말하자면

영화나 연주회, 

뮤지컬, 오페라를 보자거나

눈앞에 티켓을 내밀며, 내게

같이 가자고 하지 않는다

내가 싫어했기 때문이다


이렇게만 말하면, 

내 아래 위를 훑으며,

흔히 본색을 보인다거나

인간성이 보잘것없다거나

입만 살았다느니, 하면서 

눈을 흘길 수 있겠지만, 

사실 비난받을 정도는 아니다

물론, 비난을 받아도

눈 한번 깜박이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가 그렇게 하기로 작정한 거다


"너를 봐야 할 시간에 영화를 봐요?"

나는 애걸했다

"그런 델 왜 가요?"

안 되기에, 복걸도 했다

그래도 마뜩잖은 그의 얼굴이기에,

한 번, 같이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영화관을 나온 뒤 그는 

헤어질 시간을 확인하고

그를 처음 보는 듯한, 

슬픈 얼굴인 나를

한참 봤을 뿐,

무슨 영화를 봤는지 

내용을 말하지 못했다


시사회를 통해

각 포털이나 영화 사이트에서

별을 네 개는 기본으로 받으며,

별스런 추상명사로 치장한

평론가들의 찬사를 고루 받은,

사랑하는 이들이 볼 만한 영화로 

제법 널리 소개된 영화를

고르기 위해 그는

점심 먹을 시간을 바쳤다


그와 나는 그 후

그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잘 된 영화라면,

그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리의 이해력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를

확인할 겸 다시, 따로 본 뒤였다

"있을 때 잘하라는 건가?"

사랑에 빠진 캐릭터의 절실함은

거의 보이지 않고, 

일어난 사건에 대한

추억만 되새겨야 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한참 뒤라면 모를까

당장 죽치고 앉아 감상하기엔

궁둥이가 아까운 영화였다

뭔 사랑을 그따위로 하나?

영화가 시시하다는 데에

그와 나는 완벽히 동의했다


"굳이 너에게 잘하려고 해야 돼?"

그와 내게는 그들의 사랑을

타인의 시선으로 보기가

민망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때는 그와 내가 온전히

사랑에 빠져 있던

탓이기도 했겠지만,

영화의 내용이

그와 내가 겪고 있는

당장의 사랑에 비하면

싱겁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도 

그 영화에 대한 평가가

바뀌지 않은 것은,

다시 말해, 아직도 

그 영화가 담아내려 했던 것이

여전히 내게 

시시하게 보이는 이유가

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는 다른 걸로

나를 비난했다

그는 내게 그 자신을 던지듯,

거의 나를 노려 보며 말했다

"어떻게 옆에 사람이 아예 없는 듯,

스크린에 들어갈 듯이 영화를 봐요?"

그는 다시는 영화나 공연을

같이 보러 가자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뒤로, 그는 나를 즐기는

그 자신을 감추지 않았는데,

나는 어떤 상황에서든 

그에게서 

내가 즐길 수 있는 그를 

별 노력 없이, 문득문득

쉽게 찾아냈고,

그는 기꺼이 그런

나의 재주를 즐겼다

"나는 내 눈을 

사랑하기로 했어요.

아무리 너를 봐도 

네가 닳는 것 같지 않아요."

심지어 나는 그렇게까지 말했다


그가 즐기고 싶은 것을

즐기는 것이 당연하고

그가 보고 싶어 하는 것보다

더 볼 만한 걸 그가 스스로

찾은 것에도 불만이 없었다

그가 찾아낸,

볼 만한 것이 바로 나라면

내가 뭘, 입을 희죽거릴 밖에

내가 어쩔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막 하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아직도 나는 연인들 사이에

'뭔가를 같이 했다'는 것이

사랑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회의적이며,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뭔가를 같이 하는 것이

사회적 동물이 하는 연대일 때,

매혹은 비사회적 몰입이다

사랑하는 이를 마주 보며 느끼는 

달콤함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을

나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


그래도 내가 마뜩잖아하면서

가끔 그와 같이 갔던 곳은

<우리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며

협박과 같은 문구로

그를 벌써 유혹해 놓은

전시회나, 박물관 정도다

그런 정도의 제약이라면

그를 즐기는 데에

나를 훼방할 게 별로 없었고, 

언제든 우리만의 고도에

머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눈에 띄는 

수많은 연인들을 보면,

옆에 있지만, 거의

서로를 마주 보지 않는다


그들은 도대체 뭘 하는 걸까?

내가 보기엔 그들이

서로 사랑한다기보다는,

누군가를 옆에 둠으로써

자신의 외로움을 따로, 그리고

각자 달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결국, 세월을 따라간 

모든 것들의 뒤안길에

어디 가서 뭘 했고, 뭘 먹었고,

뭘 봤는지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언젠가 

추억할 수 있겠지만,

그들이 어떻게 사랑했는지는

말할 수 없을 거라는 걸

나는 벌써 알고 있었던 셈이다


그들이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하지 않기를

걱정하게 된 것은

요즘에 와서야 생긴 여유이며

그때는 남들의 연애라는 건

뭐, 아무래도 좋았다


매혹은 내가 그를 

어떻게 사랑하는가를

증명하라고 끊임없이 시켰고 

나는 그게 즐거웠다

그를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줘야 했고, 

그래서 그가 어떻게 그려지는지를

보여줘야 했지만, 항상 그 그림은

뭔가 모자랐던 게 분명했다


나는 제대로 그를 

그리려고 노력했고,

그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달콤했다

그런 나를 즐기는 데에 전혀

인색하지 않았던 그와,

그의 사랑스러움 덕분이었다

나는 그가 고마웠고,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나를 마주 봐주었다

중요한 건, 제대로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그렇게 여기듯,

내가 느끼는 달콤함보다 

'너'를 인지하지 않고는

갖게 되기 어려운

'너'라는 존재의 '고마움'이다 

삶의 한가운데,

소중함의 제대로 된 의미를

우리는 이때 배운다

그는 삶이 내게 준 혜택이었다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며,

모두에게 주어지는 게 아니다 

사랑이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매혹은 그와 내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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