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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Oct 08. 2021

누굴 고민하나, 너냐, 나냐?

생각편의점

누굴 고민하나, 너냐, 나냐?




연애와 사랑의 결정적 차이는

나를 앓게 하는 고민의

객체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너'를 앓으면 연애이며,

'나'를 앓으면 사랑입니다

 

흥정이 가능한 장터에서의 거래처럼

사람 공부를 시켜주는 게 연애인데,

대개의 연애지침서에서

'너'라는 사람을 다루는 요령을

말하고 있는 이유가 그것일 겁니다

 

"내 이성이 무력해졌어!"

토로하게 만드는 사랑을, 시쳇말로

'임자 만나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인간을 위한 지침은

있을 수없기 때문일 겁니다

지침이라는 건 이성적일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일 테니까요

자기 계발, 혹은 개발서가

읽을 때는 그럴듯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사랑은 '나'를 가르치며

'나'를 어쩔 수 없어하는

나를 알게 해 줍니다

이때의 앓이는,
화두가 다를 뿐, 자발적인

죽음을 생각하는 이의

고민과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들 아는 것이지만,

연애는 서로의 형편에 맞춰,

요구되는 행동들이 있고, 그 요구는

서로 양해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것을 깨면, 대개 연애가 깨집니다

그래서 연애는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물리적 거리가, 코가 헤진

구두이든 고무신이든

거꾸로 신게 만드는 이유일 겁니다


사랑에도 요구되는 것이 없지 않은데,

훨씬 단순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생사 여부와 관계없이 '너'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은 자유'가

천부적이라는 것을 '너'가 아는 것이지요



사랑은 대체로, 그를 소재로 한,

그에게 거는 기대가 거의 없는

'나'의 심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시작이 언제인지 알 수 없으며,

논리적으로는, 끝이 없는 게 사랑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그렇습니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인 겁니다

연애를 나 혼자서 할 수 없는 이유가

'너'를 고민하게 하는 것이어서일 때,

사랑을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나'가 문제이기 때문인 겁니다


좀 더 붙이면,

연애는 너와 나의 공적인 교류인 반면,

사랑은 나만의 사적인 애호인 겁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말해, BTS와는
연애를 할 수 없지만 사랑할 수는 있으며,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와도

사랑할 수 있지만, 연애는 할 수 없습니다


연애는 서로를 방치하면 깨지지만,

사랑은 외면해도 가능합니다

항상, 내가 하는 사랑인 겁니다


사랑이 식는다고 하는데,

실은, 식는 게 아니라,  

그 시절의 언저리에

흔적만 남은 사랑을 두고,

그가 가고 그대가 갑니다

그게, 우리에게 다행인 것이,

그 사랑이 삶과 함께 가면 우리는

평생을 앓게 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그렇게까지

한심하지는 않은 거지요

사랑에 중고가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누구를 고민하나?

너인가, 아니면 나 자신인가?

그걸 확인할 수 있다면,

그대가 하는 것이 연애인지,

사랑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아가, 연애는 사랑이 될 수 있지만,

사랑이 연애로 뒷걸음질하지 못한다는 건

얼핏 생각해도 알 수 있습니다




요즘은, '사귀자'라고 하고,

동의가 있으면 '1일'로

날을 세는 모양입니다

막말로, 헤어지는 데에 며칠 걸리나,

다음 날이라도 그만둘 수 있는

무기계약 연애라고 봐야 할 것 같은데,

연애나 교제는 그렇게 시작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주고받아야 할 테니까요


사람 만나

밥 먹고 차 마시고

섹스를 가졌던 기억으로,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몇 사람과 반복했다고, 또는

아이 몇 키워 제 갈길 찾아준 나이에

'사랑이, 다 뭐냐' 싶은

그대를 동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랑이 부질없다 싶어지는 늙음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늙음은

사랑에 이력이 나거나, 수없이

해봤기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닐 겁니다  

하나뿐인 줄 알고 있던 '나'가 아닌,

'또 다른 나'가 내 속 어딘가에

숨어있었음 배우게 만드

새로운 사랑을 일반화하기 때문일 겁니다


연애에는 나이로

제약을 받을 경우가 있을 수 있어도,

사랑을 괘념치 않을 수 있는 나이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건 몰라도,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랑에는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사람에 익숙해질 뿐입니다


사랑에 중고가 없는 이유입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샙니다만,

'나'를 좀 더 알게 되는 데는

장차 생길지도 모르는

그대의 아이도

그대의 사랑에 기여하게 될 텐데,

별 기대를 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사랑에 관한 이해가

'좀 더' 나아지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여기서 '온전하게'가 아니라

'좀 더' 나아진다고 하는 이유는,

인간의 부성과 모성이

우리의 본래적 본능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여,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로서

어쩌다, 아이를

"어디 갖다 버릴 수 없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고 해서

자신을 비난할 건 없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생겨 먹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짓이니까요


우리 사회의 공동선_共同善인 윤리,

혹은 사람의 눈에 묶여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이는 흔치 않지만,

실정법이 생계를 같이 하는 이들의

상호 간 부양의무를 규정하고 있는 이유가

그게 아닐까 싶습니다

요즘 가끔 뉴스에 뜨는 것을 보면,

사회의 시선에 개의치 않는 인간이

많아지긴 했지만 말이지요




그대가 '너'를 고민할 때인지,

'나'를 고민할 때인지 알 수 없지만

어떤 관계이든

'나'를 고민할 정도로 즐기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내가 사는 것이므로,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말하자면,

두 번 웃을 것을 세 번 웃음으로써

나에게 유리할 게 분명하고, 나아가

나를 즐기려는 너를 즐겁게 하기가

좀 더 쉽게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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