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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Nov 05. 2021

내가 모르는 당신에게, 미리

생각편의점

내가 모르는 당신에게, 미리




나름의 저주를 품고 사는 것이 

세상과 더불어 사는 우리가

막말로, 미치지 않고 사는 

요령일 수 있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그 덕분은 아니겠지만

아직은 우리가 손수 

누군가를 죽이지* 않아서

어떤 뉴스에도 나오지 않은 건

대체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대체로 다행스럽다'라고 하는 이유는

알 수 없는 미래의 어떤 상황에서

우리가 누군가를 죽였다고 해도

크게 놀랄 일이겠냐 싶어 지고,

그 여유 덕분에 누군가를 죽이기는

더욱 쉽지 않게 되었다 싶기 때문이고,

'아직' 살인자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를 죽여 버릴 정도로

핍박을 당하거나 위해를 가한 인간을 

'아직' 만나지 않았던 것을

다행이라고 하는 겁니다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산다고 해도 우리가

착한 사람인 게 분명한 것은,

악인 줄 알면서 악을 

저지르는 악당과 달리

어떤 악을 저지를지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겸손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자신을 온전히 안다고

하는 것은 자만일 겁니다

누군가를 죽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못할 거라고

장담하기보다,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하는 게 좀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보통 '제 잘난 맛'에 산다고 하고,

정말 우리가 잘 나서 

아직도 살아 있는 줄 알고 삽니다

그러나, 여전히 살아 있을 수 있고,

누군가를 죽일 기회가 없었던 이유는

끊임없는 경쟁 사회를 살면서도 

우리가 우연히 만나거나 

만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 

우리를 극한의 대척점에 있는 숙적으로 

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같은 하늘 아래 사는 걸 크게 

개의치 않았던 덕분이라고 봅니다

좀 더 넓게 보면 이 사회가,

우리가 함부로 죽지 못하도록 

보호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요즘 자주 보이는 일입니다만, 

혼자 나선 거리에서 우리가

뜻밖의 사고를 당하거나

원인미상의 이유로 쓰러졌을 때

비록 서툰 조치일지라도

우리를 구하려고 손을 내밀어 주는 건 

그때 우리의 주위에 있던 

행인 1이나 행인 2인 그일 겁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그렇게 

돌봐줄 거라고 믿습니다만, 

어떤가요? 우리가 그에게 당장은

고마워해야 할 이유 없다 해도

미리 고마워해도 되지 않을까요?


지나치며 눈을 마주쳤다고

시비를 거는 동네 양아치가 한심한 건,

그 시비 자체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를 살피며 지나치는 선량한 우리 덕분에

양아치 짓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닫기는커녕 

고마워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 양아치라 해도, 

풀썩 쓰러진 그를 놔두고

그냥 가버릴 우리가 아니어서,

경찰이든, 119에든 

신고를 해줄 우리가 있어서 

세상이 살만 합니다




"사이좋게!"


이것이 사회성을 기른다고 하는

우리 초등교육의 기본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요즘은 아닌듯합니다


무한 경쟁이 언제 시작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자신의 아이에만 우선을 두고,

그야말로, 보물처럼 키우는

한심한 어른을 흔히 봅니다

자신의 아이가 이상적인 삶을 

살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

자연스럽기는 한데,

중요한 건 이겁니다


내 아이가 더 사랑스럽지만,

바로 옆 동네, 옆집에서

내 아이와 달리 함부로 자라면서

선명한 경쟁을 보장하지 않는

이 사회에 대한 응어리를 가진

또래의 또 다른 아이도 있다는 것과,

같이 사는 내 아이를 사랑한다면

가끔 만나게 되는 그 아이에게

그 순간만큼은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사랑을 해줘야 한다는 겁니다 


그 아이가, 내 아이를 향한 

질시와 부러움으로

멋모르고 손에 쥔 작은 칼날이

잘 키운 내 아이를 망가뜨리고

나의 기대를 한순간에 

쓸데없게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우리는 무심하기 쉽습니다

(꼭 칼이 아니어도, 따돌림

신체/언어 폭력, 갈취와 강요 등

어른의 세계와 다르지 않습니다)


내 아이를 제대로 키우려면

옆집의 아이가 어떻게 자라는지,

내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내 아이처럼 살피려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싶은 겁니다


국가 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살림살이가 좋은 내 나라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한다면

이웃 나라의 살림도 돌봐야 합니다

그 차이가 심해지면, 

둘 사이에 알력이 심해지고

결국 전쟁이 일어난다는 건

역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좋은 친구가 보여주는 

긍정적 인간 관계보다

더 나은 교육이 있을까 싶습니다만, 

코로나 팬데믹 덕분에 

그럴 기회를 많이 잃겠다 싶은

아이들이 안쓰러운 이유입니다)


우리가 함부로 길에 나설 수 있는 것은

그 길 위에서 마주칠 모든 것이

주어진 목적에 따라 

움직일 거라는 믿음 덕분이며

누군가에게 위해를 먼저 가하지 않는 한

그들도 우리에게 위해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마침 이 생각을 잡고 여기 브런치의 

'작가의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살을 붙이고 빼고 있는 가운데,

어떤 나라에서는 총을 

마구 쏘는 게 흔하지만

옆 나라 일본에서는 

엊그제, '시월의 마지막 날, ' 

지하철 내에서

만화 속 조커 분장을 한

스물네 살의 그가 우리에게 

'묻지마' 칼부림을 해서 

열일곱 사람이 피를 보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가 악당이 되기로 하고 

태어나지 않은 게 분명하다면

그를 그 행위만으로 평가하거나,

그와 우리 사이에

감정적 빚이 있는지 없는지

헤아리는 건 벌써, 그리고 항상 늦습니다


"공동체 개념의 위기와 함께 오직 자기만 아는 무문별한 개인주의가 생겨났다. 이런 사회에서는 누구도 더는 타인의 동반자가 아니다. 주변엔 오직 내가 맞서서 나 자신을 지켜내야 할 경쟁자나 적뿐이다.**"


움베르토 에코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1 년 전쯤(2015년)에 이해한 요즘 세상입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 또는 주위 사람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은

그 참사 전에 비해 

절반 이상 하락했다고 하고,

'각자도생'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나아가 사회에 대한 신뢰를 가진 이는

열 사람 가운데, 채 

한 사람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모르겠으나,

코로나 덕분에 사회적 거리두기 등

서로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역설적 위로로

우리 사회에 대한 그 심리적 트라우마가

조금은 풀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짜증 나게 하는 악인이든 

괜히 웃어주지 않아도 좋은 선인이든

마구 사랑하게 되는 사람이 있고,

도저히 사랑이란 것은 

생각하게 되지 않는 사람들 속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나'가 살아있도록 해 준 사회에는

사랑하고 싶지 않은 인간도 많지만,

어쩌다, 사랑할 수 있는 그대를

만나게 하는 사회에, 우리가 

마음속으로는 고마움을 품고 사는 게 

크게 바보가 되거나, 손해가 나거나,

지나치게 베푸는 일은 아닐 겁니다






*'죽인다'는 말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쓰지 않게 되는 아이들의 말이지만, 자주 씁니다. '살해'와 같은 말은 뉴스나 신문에 나오는 기사로 익숙해진 탓에 남의 일처럼 '나'에게 현실감을 주지 못하지만, '죽인다'는 말에는 그 실상이 그려지는 힘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많은 컴퓨터 게임에서도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으므로, 죽인다는 표현도 그다지 실제적으로 가슴에 와닿지 않는 때가 흔합니다. 

또 다른 예로, '전쟁'이란 말을, 특별히 지켜야 할 법이나 규정이 거의 없이 사람을 함부로 쳐 죽이는 시합이라는 인식과 함께 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 움베르토 에코가 쓰고 박종대가 우리말로 옮긴 책,『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는 방법』가운데, "유동 사회"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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