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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May 03. 2023

힘자랑

생각편의점

힘자랑




혹시 그대가

사랑을 감출 생각이라곤

전혀 없는

나와 다르다면,

그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해,

잠 못 드는 어느 날

"너를 사랑해!"  

그를 염두에 두고 밤하늘에,

외쳐 보면 쉽게 알 겁니다


그 순간,

어쩐지 자신이 중대한 일을

해낸 것 같은 착각과 함께,

"사랑해"라는 그 말속의 '너'는

왠지 그대에게

더욱 특별해진 듯하고

그때 보인 하늘이

어제의 밤하늘과는 확실히

달라진 듯 느낄 겁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여늬 말과는 다른 거지요


"성공할 거야."

"잘 살 거야."


이런 말에는 패기라든지

북돋우는 힘이 있기는 하지만,

가슴속에 똬리를 튼

미래의 막연함과,

미래를 기약하긴 해도

불확실성을 감추려는

자기기만을 무시할 수 없어서,

허공에 괜한 주먹질을 한

기분을 버리기 어렵습니다


그와 달리, 사랑한다는 것에는

시제가 현재밖에 없어서

즉각적인 성취감을

느끼게 되기 마련입니다

의미를 잃지 않을 뿐 아니라

시제를 가진 다른 말과 달리

사랑이 오직 현재인 거지요


"사랑했다"

"사랑할 거야"

"사랑일 거야"


이 말들엔 사랑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시제를 가지면,

사랑하는 즐거움을 잃은 것이거나

잃은 뒤의 회한이게 됩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말 그대로의 의미로 쓰는 한

우리가 하는 말 가운데

가장 적나라하고 깔끔하며

겸손하지 않은 말일 겁니다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의

김어준뿐 아니라, 사랑도

겸손하기를 힘들어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그렇게

자기 말에 자신도 모르게

취하기 쉬운 인간으로서

우리가 가진 말 가운데

가장 힘센 말이기도 합니다


아니면 아니라고,

맞다면 그렇다고 해야 할, 

그 '참'을 억눌러야 할 

이유를 모르겠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은 

뜨겁기도 하고

한 겨울 칼바람처럼

무정하기도 한 겁니다




타자를 사랑하지만

그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건

사랑을 말한 나 자신입니다

사랑받아서 죽은 이는 없어도

사랑한 까닭에 죽은 이들이
훨씬 더 많은 이유일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어느 날 그가

그대의 의미가 되어갈 때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줘도 좋아, "

라고 할 때까지는 그가 그 말을

내뱉지 않도록 신경 써줘야 할 겁니다

그가 그 말을 해도 좋을 때는,

그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느낄 때일 겁니다

 

그래서 내가 그를 사랑하면 좋지만,

사랑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사랑일 때이기도 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의 힘을

알고 있는 우리는 아무나에게나

우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게끔 해서는 곤란합니다

그 말을 입에 담은 '나'도 바뀌니까요


거꾸로, 그대의 마음이

뭔지 잘 모르게 될 때는,

"아, 이게 사랑인가, " 싶어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봐야,

그의 마음을 알게 될 겁니다


갑자기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말보다 더 나은 말을

알지 못하고, 달리

새로운 말을 만들 재주가 없어서

그 자신도 달리 방법이 없고

그에게 '특별한' 느낌을 주고 싶어

하게 되는 말이 사랑인데,

그게 너무 평번한 말이라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될 겁니다

그게 사랑의 힘자랑이지요


(그에게는 사랑을 말 못 하게 하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을 때 한다면,

"그건 불공평한 게 아니냐?"

묻고 싶을지 모르겠는데,

나와 취향이 다를 수도 있는

그가 묻는다면, 따져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내가 나 자신에게

굳이 형평의 여부를 따집니까?

그것만큼 미련한 일은 없습니다

내가 내게 이기적인 걸 어쩝니까?)


여하튼 그 사랑이 진짜라면,

그걸 이기지도 못하지만

그저 못 이기는 척, 져주는 게

사랑과 맞닥뜨린 

사람이 할 일일 겁니다

겸손하면, 거의 틀림없이 

사랑은 아예 없는 것과

다르지 않게 되기 쉽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나라가

하 수상해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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