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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덕분에

생각편의점

by 어뉘

한강 덕분에





현재는 없어진 선상 직책인

통신국장이 방금 받은 팩스를 들고

브리지(항해선교)로 뛰어올라왔다

인터넷이 없었고,

텔렉스도 귀했던 시절이었다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었다"


박정희서거(逝去)가 아니었다

박정희사망(死亡)이었다


헤드라인이 그랬다

마이니치인지, 요미우리, 혹은

다른 신문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물론 당시 국내 신문 등의

검열된 보도와는 당연히 다르다

일본 해원들을 위한

일본어 해외 뉴스서비스에서였다


"마침내!"


그랬다

일본 팩스 편집자도 그랬을까,

저잣거리 졸부에게 내뱉듯, '죽었다'라니!


'너무 편하게 죽은 거 아닌가'

그 후, 어느 날 문득, 아쉽기는 했다


당시 배는 아덴만을 지나

홍해를 북상 항해하고 있었다




사실, 북한의 동향을 걱정했는데,

거기까지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에서

플랜트 설비를 내려주고

다시 바다로 나왔을 때

팩스에는 김정일이 아니고,

최규하도 아니고

듣보잡 전두환이 실려있었다


대통령 유고 상황에

군인이 나섰는지 궁금했지만,

선박의 업무가

매일 새벽 뉴스를 받아볼 정도로

한가하지 않고, 하루 몇 분간만

송출되는 팩스도 전파의 장난으로

수신되지 않을 때도 흔했던 때였다


뭔가 타당한 경우일 테지, 했다

그러나, 사회가 안정이 되려면,

전 씨의 얼굴로 볼 때,

시간이 필요하겠다는 느낌은 있었다




선박에게는, 말 그대로,

시간이 돈이고, 그 액수가 크다


사우디의 제다를 나온 배는

수에즈 운하를 넘어

지중해를 가로질렀고,

지브롤터 해협을 빠져나와

대서양을 횡단해서

남부 미국으로 향했다


사스주 휴스턴과 갈베스턴에서

대두(Soybean)를 싣고

대서양을 북동쪽으로 항해하여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 내려줬다


겨울, 대서양의 바람과 파도는 유명하다

일반적인 유로-아메리카 대서양 항로는

영국해협을 벗어나며

육지를 만날 일이 없지만, 겨울철 황천에

항로를 조금 양보했던 터였


보통 이틀이면 벗어나는 비스케이만에서

남서쪽으로 닷새를

황천하의 바람과 파도를 버틴 결과

마침내 육지초인(Landfall)을 했는데,

변침 목표인 스페인 반도 북서단의

Cabo Trece는 아니었다

비스케이만을 건너가 만난 것은

만의 남부 동쪽 깊숙이 자리 잡은

스페인 북동쪽의 Punta Vergajo였다

만을 벗어나 변침 몰표인

Cabe Trece를 만나려면 서쪽으로

하루 반을 더 항해해야 했다


한 마디로,

하루 반이면 건너는 비스케이만을

일만사백 마력의 선박 엔진이

파도밭을 그르렁 가르랑거리며 기를 쓴 결과,

엿새 반 만에 건넌 거였다


사실, 괜찮지 않았다

나중에 전해진 소식에 따르면

그 황천에서 승조원 전부와 함께

침몰한 배도 있었다고 했다


인간은 착하지 않다

유발 노아 하라리의 관찰처럼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인종 가운데

가장 이기적이고 잔인한 종족이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다

그러니까, 내가 착하다면

착각이거나 그렇게 보이려고

기막힌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착하게 사는 게 힘든 이유다


이십여 명의 선원이 수장된 것뿐이다

그 바다를 간 게 인간이니까,

인간이 함부로 수장될 뿐이다

침몰한 배와 선원에 대한 묵념은 없었다

인간과 싸워 굴복한 게 아니라

바다와 싸운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게 몇 개월을 보내고

공선으로 영국해협을 벗어난 배는

다시 비스케이만을 건넜고,

지브롤터를 지나 지중해를 서쪽으로 질러

수에즈 운하를 넘었다

최종목적항은 태국이었지만,

선박 연료 보급을 위해

싱가포르로 항진 중이었다


말라카 해협을 내려가고 있을 때,

일본으로부터의 팩스가 수신되었다

아직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진행 중이었다


팩스는 들숙날숙한 전파 덕분에

온전히 수신된 것은 아니었지만

내용을 확인하는 데는 어렵지 않았다


거기, 젊은 여인의 봄치마 끈을 풀어

아이가 곧 태어날 듯 탱탱하게 부른

만삭 배를 여지없이 드러나도록

요구한 한 계엄군이,

그 여인의 맨살인 배에

대검 꽂은 소총의 칼끝을

갖다 대고 있는 사진은 선명했다


"이 안에 뭐를 숨겼어?"


계엄군은 그렇게 물었고,

곧이어 자기 말에 허적 대던

그 비겁한 개의 새끼는,

"보자, 뭐가 들었나!" 내뱉으며

대검 꽂힌 총끝을 대질렀고

여인의 배는 그대로 뚫렸다




그 한 장면이, 내게는

5.18의 모든 것을 설명했다

훗날 귀국 후, 그 만행에 관한

국내 신문의 기사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엔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전두환의 치세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 이후, 나는 광주에 대해

알려는 수고를 하지 않았는데,

시민의 저항은 당연한 것이었고

운동을 폄하하는 모리배 가운데,

내가 사진 한 장으로 받은 5.18을

다른 시각으로 납득시켜 줄 인간은 없었다




이제, 인간의 본성에 대한

혐오만 품고 있던 나와 달리

인간에 대한 애정을 어쩔 수 없는

한강의 눈으로 다시 광주 5.18과

제주 4.3을 들여다봐야 할 듯하다


당장 서두르지는 않을 테다

우선 인간, 한강에의 사랑을

몇 년은 해야겠고, 그 이후

그의 글이나 인간이

일반명사로 불릴 즈음 그를 읽어도,

사랑하기로 한 이상, 늦을 일은 없을 터다


다만, <채식주의자>를 너무

일찍 읽은 게 아쉽기는 하다

읽히는 대로 읽기는 했지만,

갑자기 그를 제대로 읽었나 싶은

의문이 생기니 말이다


그렇다면 다시 읽어야 하나?

글쎄, 한강에 대한 사랑이 깊어져

다시 읽고 싶을 때가 온다면

그래도 좋겠다 싶다

그래서, 이미 읽은 원작 외에,

영어 실력은 보달 것 없지만

세계가 그의 작업을 평가하게 한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본으로

<채식주의자>의 다른 질감을 느껴볼 참이다


그리고, 스웨덴 한림원은 <소년이 온다>로

시작하라지만, 그건 서양인의 인식이다

언젠가 말했듯이, 여전히 나는

베스트셀러를 서둘러 읽지 않는데,

저변에서 중심으로 치오를 생각이다


그를 시인이게 한,

그를 싱어송라이터이게 한,

그를 소설가이게 한

어린 한강부터 사랑해 갈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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