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당신이 신이다

생각편의점

by 어뉘

당신이 신이다




내가 당신의 사랑을 원하면

당신을 먼저 사랑해야겠지요?




지금은 그 위치를 옮겼지만, 옛날

감리교 계통 학교를 다녔는데, 그때는

서대문 독립문 근처에 살고 있어

등교를 하려면 한참을 걷고,

돌담을 사이에 둔 이화여고 앞을

지나야 했던 오래된 학교여서

교회는 알 만큼 알고 있었지만,

그 후 다니던 교회 교목의 삶*과

교리에 대해 회의적이 되어

발길을 끊은 지 한참 되던 때였지요


사춘기 끄트머리의 어느 날

저녁을 먹고 산책 삼아

발에는 슬리퍼, 그 위에

얇은 러닝셔츠 같은 겉옷을 걸치고

어슬렁거릴 생각으로 나왔지요


막 여름해가 기죽어

바람이 서늘했는데, 들어간 곳은

늘 지나치기만 했던

하숙집 옆의 교회였습니다


평일이어서 본당에는 아무도 없지만

기백명 정도가 앉을 긴 의자는 그대로

의자 등받이는 차가웠는데,

그냥 멍하니 앉았다가

남들 하듯이, 기도라도 하자 했지요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는 타인은-

그 타인에는 신도 있겠는데-뭔가

의미를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나의 속내와는

아주 동떨어진 그림인 까닭은

혼자 기도를 한 적이 없어

나 자신이 생각해도 어색했거든요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들더군요

대강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신은 유머가 없고, 그래서 웃지 않는다

<정신>이란 게 없기 때문이다

신이라니 그래도 되는가 싶어도,

모든 인간은 원하는

스스로 갖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것을 갖게 되든 아니든

신의 뜻인 것으로 알라며

시혜자가 되려는 이기를

감추지 않는데, 결국 기도라는 건

나 자신을 북돋우기 위한 것 아닌가?"

아마도 그때는 머리가 큰 거겠지요


신이 뭔 짓을 하든, 당신의 사랑을 원하면

먼저 당신을 사랑해야 하지 않냐는 겁니다


그때 신을 안 것 같았던 겁니다

내가 하는 짓으로 내가 된다는 건,

나 자신이 신이라는 겁니다

그 심로는 불교의 선(禪)과 통합니다


관념과 추상이 힘을 발휘하는

합리화에 아주 서툴기 때문에

즉물적 사고를 하는 나에게는,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신앙이란 것은 신이 되기를

포기한 사람들의 피난처이고

자신의 능력 너머에 있는

우월자의 사소한 시혜를

바라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신의 눈에, 기도하는 나는

길거리에 나앉은 걸인이었습니다

배부르게 먹은 저녁이 아직

뱃속에 차있었는데 말이지요




당신이 신인 겁니다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는 건 내가

신을 사랑하는 것이지요


나를 기쁘게, 또는 슬프게 하고

때로 나의 가슴 설레게, 때로 서늘하게,

때로 를 울게, 때로 웃게,

때로 나를 박애주의자를 만들기도 하며,

때로는 지독히 독선적이게 하는

당신이 신으로 불려도 될 겁니다


언젠가 쓴 적이 있는데, 그래서

사랑이 '신들의 놀이**'이며

즉물적인 이유일 겁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우리, 신들의 놀이를 하자"면

그가 당신을 신으로 여긴다는 것은

굳이 아는 척할 건 없을 겁니다

신이라도, 자신이 신이라는 걸 누군가

확인해주는 건 제법 쑥스러울 테니까요








*탄핵과 내란 국면 덕분에

동조할 수 없었던 개신교의

신, 신앙을 버린 이유와

옛날 인물을 추억함

**신들의 유희, <사랑엔 중고가 없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