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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숙집 이모 Jun 05. 2021

거꾸로 쓴 이력서

지난 주말에 친구들을 만났다.

오랜 친구와 약속을 잡았고 그 친구와 친분이 두터운 그녀를 함께 보게 되었다.

그녀는 잘 나가는, 일명 성공한 사람이다.

회사의 대표이사 직함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 현장에서 진두지휘하는 전문가이기도 하다.


이 친구에 대한 기억은 양면적이다. 조용히 앉아서 붓으로 세로글씨를 쓰거나 난을 치는 모습과 교내 배구시합에서 센터를 중심으로 코트를 종횡무진 날아다니던 모습이다.

화선지에 난을 피워내고 땀을 머리 위로 쓸어 올리며 헉헉거리기도 하던 친구가 어떻게 전기회사를 운영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친구가 전한 말이다.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언니가 사는 도시로 올라와 직장을 구하려 했다. 아무런 기술이 없으나 아무 데나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컴퓨터 학원에서 CAD를 배우기로 했다. 원래 수학이나 도형 같은 것들과 친하지 않았던지라 쉽지 않은 공부였다. 학원 선생님은 차라리 만화를 그려보는 게 어떠냐고 말했다. 그 말에 오기가 생겼다. 이를 악물고 공부를 마쳤다. 그 당시 여자가 CAD를 하는 경우가 드물어 전기 배선 작업하는 회사에 설계 디자이너로 취업이 되었다. 어느 날 공장에서 배전함의 불빛들을 보는데 황홀하고 아름다웠다. 그건 운명이었다. 내 평생에 그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전문대학에 입학해서 회사일과 학업을 병행하게 되었다.


전공 수학은 당황스러웠다. 고등학교 때 공부했던 미분이나 적분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공식을 외우고 풀이과정도 외우면서 시작한 공부였지만 하면 할수록 빠져들었다. 수학은 답이 정해져 있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묘한 매력이 있었다.


공부도 회사도 자리를 잡아갈 즈음 IMF가 시작되었다. 회사가 부도났다. 그 와중에 회사에 납품을 의뢰한 거래처와의 약속을 젊고 믿을만한 직원이 지켜냈다. 그 직원에 대한 신뢰로 거래처들이 일을 맡겼고 그 직원이 시작한 회사를 돕게 되었다. 믿을만했던 그가 프러포즈를 했다. 그렇게 동료에서 사장이 된 그와 결혼했다. 매출이 계속 늘었고 더 많은 수주를 위해 회사를 분리해 대표로 이름을 올렸고 공식적인 문서에 내 이력서를 첨부해야 했다.


이력서를 앞에 두고 망설였다. 쓸게 없었다. 뭔가 내놓을 만한 게 없어 부끄러웠다. 곰곰이 지난날을 되돌아보았고 또 미래를 떠올려 보았다. 50살이 되었을 때 내가 이력서를 쓴다면 어떤 내용들로 채워져 있으면 좋을까를 생각하니 답이 보였다.


진심을 다해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나를 쓰지 않고 미래의 나, 50세를 기준으로 거꾸로 된 이력서를 썼다.

50세에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있다, 40살의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있다. 20대 후반의 회사 대표가 50살을 기준하여 거꾸로 이력서를 쓰니 당장 해야 할 것이 보였다. 그래서 다시 4년제 대학에 편입을 했고 어린 친구들에게 형이라 부르며 그들에게 배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사업과 학업을 병행하느라 4시간 이상 잠을 잔 기억이 없다. 회사 운영도 처음이라 세무, 회계, 법무까지 필요한 공부를 모두 했다. 직원을 채용해 업무를 맡기려 해도 뭔가 알아야 업무를 분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운영하며 깨달은 것은 사람이 재산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회사가 있기까지 주변의 도움이 많았다. 회사가 받은 어음을 다른 분께 할인받았는데 그게 부도났다. 그분은 언제든 갚기만 하면 된다고 했으나 일주일간의 말미를 주시면 갚겠다고 약속을 했다. 적금을 깨고 아이들 돌반지를 팔고 형제들에게 돈을 구해 부도난 어음을 갚아드렸다.

그 일로 신뢰를 얻었다. 사실 그분은 은인이다. 은행에서 신용을 원할 때 보증인이 되어 주셨다. 사람이라는 재산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회사가 힘들 때도 거래처 사장님들을 모셔 놓고 우리 부부를 믿고 기다리시면 끝까지 보답하겠다고 했다. 그분들이 믿고 기다려 준 덕에 회사가 성장을 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50이 훌쩍 넘었네,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뭐 대단한 걸 이룬 건 아니야. 조금 더 열심히 살았고 부족한 게 많아 공부를 했을 뿐이지. "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온 후 내 이력서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친구가 거꾸로 쓴 이력서의 기준이었던 50세,

그 나이를 지나쳐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도 나름 열심히 살았으나 이력서에 쓸 무엇이 없다.

50대! 내 나이 때를 중년이라고 부른다.

중년! 정말 인생의 가운데를 살고 있는 것이라면 지금 이력서를 거꾸로 써봐도 되지 않을까, 너무 늦은 게 아닐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가슴이 두근거리며 차오른 생각이 공중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소중하게 글로 묶어 본다. 신뢰를 바탕으로 쌓인 재산(사람들)과 함께 돌아보고 웃을 수 있는 80세를 기준하여 거꾸로 된 이력서를 써봐야겠다.  


하숙집 이모의 책소개

하숙집 이모의 건물주 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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