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사랑이 필요한 거였다
제목을 입력하라고 커서가 껌벅거린다.
무언가 써보려고 머리를 쥐어짜 보지만 눈만 커서를 따라서 껌벅거린다.
작가의 서랍에는 쓰다 만 글들이 대충 개어 놓은 빨래 마냥 대충 포개져 쌓여 있다.
나의 글쓰기가 뒤처지고 있다.
책이 출간된 후
지인이 물었다.
책도 내고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사는 것 같은데 정말 하고 싶은 게 뭐야?
별 망설임 없이 쉽게 대답을 했다.
한가롭게 책이나 보고 글이나 쓰고 살고 싶어요.
그렇게 살고 있는 게 아니냐고 또 물었다.
욕심이 많다는 말도 덧붙였다.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욕심이 많다는 말은 옳다.
한가롭게 책이나 보고 글이나 쓰는 게 쉬운 일인가?
일단은 '한가롭다.'는 내게 너무 먼 말이다.
매일 시간에 밀려 산다. 한 가지 일을 하면서 다음 해야 할 일을 생각한다. 생각은 하고 있는 일보다 한 단계 앞서서 내 몸을 빨리 오라고 끌어당긴다.
그리고 '책이나, 글이나'는 어렵다.
읽어야 할 책 선정이 쉽지 않다. 문학을 하고 싶어 하면서 정작 자기 계발서나 경제관련서를 주로 읽는다. 나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그런 책도 좋은 게 많다.'는 말로 위로를 한다.
무엇보다도 '글이나 쓴다.'는 것은 '감히!'다.
최근에 내 책을 읽으신 독자분께 선물 받은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저자는 평생 야생동물을 연구한 학자인데 70세가 넘어 처음으로 쓴 소설이다.
야생의, 늪지대의 어린 여자 아이, 카야가 어른이 되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외롭지만 쓸쓸하지 않게, 슬프지만 눈물을 파도 속에서 이겨내는, 가냘프지만 용감하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아무것도 필요치 않게 그려낸 이야기다.
처음 쓴 소설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능숙한 글 솜씨고 동물학자라고 하기엔 문학적 묘사가 섬세하다.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놀라운 능력에 경이로운 감정이 들었다. 그리고 아주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또 다른 감정을 느꼈다.
열등감! 내가 이 훌륭한 작품 앞에서,
감히! 열등감을 느꼈다.
어떤 대상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공부하고, 관찰하고, 사랑해야 이런 묘사가 나올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내가 원하던 '한가롭게 책이나 보고 글이나 쓰고.'는 욕심일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한가로운 게 우선이어야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건 핑계일 뿐이다.
한가하면 다 될 거라는 생각은 수고하지 않고 거저먹겠다는 못된 심보일 뿐이다.
수고가 필요한 것이고 '사랑해야'가 우선이었다.
사랑하면 관찰하게 되고 관찰 대상이 더 궁금해지니 계속 보고 싶고 그 마음을 담아 수줍게 연애편지를 쓰게 될 것이다.
내가 뒤처지고 있던 이유,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책이나, 글이나 라는 말도 틀렸다.
'~이나'는 '시간이나 상황에 제한 없이 자유로움'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가벼움이었다.
이제 내 주변의 대상에 대하여 사랑을 해야겠다.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렇게 사랑이 깊어지면 심장이 펄떡이고 가슴이 두근거려 밤새워 연애편지를 쓰듯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