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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숙집 이모 Jul 10. 2020

월급 턱을 내던 그 시절

세 자매 이야기

결혼 전 언니들과 살던 시절의 이야기다.

1990년대 그때는 월급을 급여봉투에 받아왔다.

제법 질긴 재질의 종이로 만들어진 봉투 위에  받는 사람의 직급과 이름이 쓰여 있고, 기본급, 호봉수, 수당, 식비 등의 목록이 적혀 있고 전체 합계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그 안에는 봉투 위에 적힌 금액과 똑같은 액수의 지폐와 동전들이 두툼하기도 조금 얇기도 한 모습으로 들어 있었다.


월급을 타는 날은 기분이 좋았다. 요즘은 월급을 통장으로 받아 월급날의 특별함도 사라졌고 어떤 사람들은 카드로 선지출을 하는 바람에 월급날은 통장만 알고 정작 본인은 돈 구경을 못해보았다는 우스게스러운 소리를 하기도 하는데, 그 당시 월급날엔 급여 액수 그대로 봉투에 담겨 당사자의 손에 들어가는 게 정상이었으므로 그날만큼은 모두 부자의 마음이었다.


우리 세 자매의 월급날은 제각각이었다. 월급을 타면 제일 먼저 자신에게 할당된 생활비를 내놓았다. 쌀값, 부식비, 전화세, 세 들어 사는 주인집에서 정해준 전기세 등과 겨울에는 연탄값을 더하여 책정된 금액을 3분의 1로 나눈 액수를 제일 먼저 지출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행사를 치른다. 다른 자매들에게 턱을 쏘는 일이다.


국어교사로 감성이 풍부한 큰언니는 동생들에게 문화체험을 시켜주었다. 상영되는 영화 중에 수준 있는 것들을 찾아서 관람시켜 주었다.

그때 보았던 영화는 "초라한 차림을 비웃던 점원을 꼼짝 못 하게 기죽이는 장면이 완전 시원한 사이다였고 뭇여성들을 신데렐라 증후군에 빠지게 만들었던 '프리티 우먼', 남자 친구와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 말고 가짜 오르가슴 소리를 흉내 내는 맥 라이언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빛나던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죽은 남자 친구가 반지를 움직여 자신의 존재를 일깨우는 장면에서 눈물을 찔끔거렸던 '사랑과 영혼', 영화 그 자체가 아름다운 세상이라 생각하게 하였던 '시네마 천국', 그 밖에도 웃고 울게 했던 숱하게 많은 영화들을 보여 주었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올때는 영화의 내용이나 장면 대사등이 어떠하였었는지 서로 이야기 하였는데 각각의 감상을 충만하게 누리는 시간들이었다.


종로 3가의 단성사나 피카디리극장 호암아트홀을 큰언니 덕에 구경하였었다.


외국계 회사에 다니던 분위기가 고급진 둘째 언니는 큰언니처럼 영화를 보여주기도 하였지만 대학로 소극장에서 연극을 보게 해 주었다. 연극의 내용이나 장면은 기억에 없고 가수 한영애 님이 관객으로 오신 것을 극 중 인물이 알아보고 무대로 모셔가 노래를 부르게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한계령'이란 노래를 불러 주셨는데 그 후로 그분의 목소리에 매혹되어서 계속 좋아하게 되었다. 둘째 언니는 좋은 식당에서 좋은 음식을 먹게 해 주었다. 고급호텔의 케이크나 제과도 둘째 언니 덕에 먹어 보았다.


세상 철없고 언니들에 비해 정서나 외모가 보잘것없는 나도 월급을 타면 한턱 쏘았다. 한결같이 치킨을 사는 것으로 턱을 냈었다. 지금같은 배달 시스템도 없어 퇴근을 하면서 치킨집으로 가 주문을 하고 치킨이 튀겨지는 것을 구경하며 기다렸다가 들고 왔었다. 또 치킨의 종류도 지금처럼 다양하지 못했다. 아마도 후라이드 치킨에서 양념치킨으로 발전도 그때쯤이였을 것이다. 하여튼 후라이드 치킨 한마리를 직접 들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언제나 즐거웠다. 혹여나 언니들 중에 누구라도 늦게 들어오면 조금 식은 것을 먹기도 했지만 치킨은 어떻게 먹어도 맛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치느님의 배신은 없다. 나의 턱은 소박했으나 워낙이 짠순이인 것을 인정해주던 착한 언니들은 그 턱도 기쁘게 즐겨주었다.   

우리 세자매는 월급을 타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지하철을 타고 한시간 가량의 출근을 하고 힘든 직장 생활을 마치고 또 한시간 가량 걸려 퇴근을 했지만 월급을 타기 여러날 전부터 어디서 무슨 영화를 볼꺼란걸 알고 또 어떤 근사한 레스토랑서 식사를 하게 될 것을 알고 기다리는 동안의 밤시간엔 행복한 이야기로 하루의 피곤을 녹이곤 하였었다. 한달에 세번 우리 자매들의 정기 행사는 언니들보다 내가 먼저 결혼해서 언니들 곁을 떠나올때까지 2년넘게 지속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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