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문제는 무엇일까.
근린공원에 너구리 출몰 이후 생각이 많아졌다. 산이라고 부르지만 약수터, 배드민턴장, 산책로, 휴식용 정자, 각종 운동기구 등으로 꽉 찬 공원에 삼십 년 동안 다녀봐도 근래처럼 야생동물이 눈에 띄게 자주 목격된 적은 없었다. 관련 뉴스를 찾아봐도 최근 몇 년 사이 도심 속 공원에 야생동물 출현 빈도가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심각하게는 공원에 마련된 고양이 급식소에 너구리 같은 잡식성동물의 출현이 많아져 길고양이를 돌보는 이들이 비난을 받는 일까지 벌어졌다. 좀 더 안타까운 현실은 소위 전문가로 불릴만한 사람들이 캣맘 비하 영상을 공유하며 도심에 야생동물 출현이 캣맘 때문이라는 마녀사냥식 영상물을 버젓이 공유한다는 점이다.
나는 오랜 시간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것으로 생계를 꾸려왔다. 예술가로 살아도 돈은 있어야 먹고 사니까 자금을 끌어모을 예술 기획을 마련해야만 한다. 기획의 ㄱ 자도 모르던 시절에 인터넷에 떠도는 무료 기획서 끌어모아 분석하며 기획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한 마디로 기획은 문제 설정과 해법 찾기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일개 개인이 먹고살려고 하는 프로젝트 기획에만 문제 설정과 해법 찾기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세상 일이 전부 문제를 설정하고 해법을 찾아가는 길의 연속이랄까.
그럼, 너구리 출현을 통해 본 문제는 무엇이고 해법은 뭘까? 물론 내가 해법까지 찾는 것은 어렵지만 문제를 설정하는 것에 대한 조심스러운 의견 정도는 내놓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문제 설정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접근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말 그대로 골칫거리로 다가오는 현상 자체를 문제로 보는 방법이 있을 것이고 둘째, 마찰이 생기된 된 직접적 원인에 대한 문제 설정 방식과 셋째, 좀 더 통시적, 공시적 관점을 통합한 거시적 관점에서 문제를 짚어가는 문제 설정 방식이 있을 것이다.
물론 대개의 문제 설정과 해법은 아쉽게도 문제의 원인이 아닌 문제의 대상에게 일방적으로 전가되어 문제의 대상에 대한 사회적 여론에 따라 그 처우가 정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아쉽게도 문제의 대상으로 지목되는 경우 그 대상은 사회적 위치가 약자일 경우가 많아 권력에 의해 생사여탈이 좌우되는 경향이 많다는 것을 염두했으면 좋겠다.
우선 가장 사례가 많은 길고양이를 예로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길고양이를 사람들의 관심 대상으로 올린 중요한 사건이 있다. 한 지역에서 골칫거리로 여겨지던 고양이를 주민들이 아파트 지하실에 감금해서 굶어 죽게 만든 사건이다. 이 사건이 공론화되면서 살아있는 생명을 경시하는 사회에 대한 경종을 울렸고, 길고양이를 보호하기 위한 관심과 직접적인 행동들이 구체화되는 도화선 같은 사건이었다. 고양이의 생활방식이나 습성이 인간에게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학살할 수 있다는 생각이나 그 생각에 반대하는 생각의 대결에는 동물에 대해 윤리적 태도가 무엇인지 공유되지 못한 사회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런 만큼 이 사건은 우리가 동물을 대하는 인식의 문제를 지적하기보다는 문제의 대상이 된 고양이의 처우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만 낳았다. 먹이를 주느냐 마느냐, 개체수가 많네 적네 등등. 길고양이를 둘러싼 수많은 논쟁 속에서 탄생한 정책들은 급식소를 마련하되 개체수가 늘어나지 않게 중성화 수술을 시켜 고양이 번식률을 줄이자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왔다. 이러한 흐름은 일차적 문제 대상을 고양이로 본 것이다.
고양이 자체를 문제 삼아 인간이 할 수 있는 제재를 고양이에게 가했으니, 다음으로 생긴 흐름은 고양이도 도시공간의 일원이라는 문제 설정과 그에 대한 해법을 찾아가는 방법들에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사 가는 둔촌냥이’ 프로젝트다. 대규모 재건축 지역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고양이를 대규모로 이주시키는 프로젝트로 재건축 지역에서 길고양이를 이주할 수 있는 방법부터 정책 제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문제의식을 사회에 제기했다. 고양이와 사람 간의 마찰에서 오는 해법들이 부득이 불평등하게 동물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경향이 있다 보니 고양이를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놓을 지에 대한 고민들이 태동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그 프로젝트를 통해 처음 제시된 해법 중 하나가 고양이를 인간 사회에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바로 ‘동네 고양이’라는 명칭을 통한 주민권 획득에 대한 시도였다. 고양이의 영역 동물로서의 특성이 반영되기도 했고, 길고양이라는 호칭에서 생기는 유랑의 이미지를 소거하며 정주권의 당연성을 주장한 것이다. 고양이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 고양이의 정주권 주장을 통해 도시가 인간만의 영역일 수 없음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인간의 비호아래 인간만큼 곳곳에 퍼져나간 고양이는 인간만큼은 아니더라도 생태계에 여러 문제를 양산하는 주체로 떠올라 또다시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이번에는 고양이의 사냥 본능이 문제가 되었는데 섬처럼 고립된 공간에 사는 희귀 조류에 대한 사냥이 희귀 조류를 멸종으로 치닫게 한다는 문제였다. 이 사건은 한 유투버의 주관적인 견해를 생태운동계가 수용하면서 소위 전문가와 뭣도 모르는 캣맘, 캣대디의 대결로 비화되었다. 왜냐하면 탐조활동하는 유투버가 고양이가 생태계를 파괴했다는 연구 논문을 공개하며 길에 사는 고양이를 전부 입양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해법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동물 단체나 길고양이 보호 활동하는 사람들이 반대 논문을 공유하거나 유투버의 문제제기 방식 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집단으로 비난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 대립 구도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소위 ‘전문가주의’에 대한 맹신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잠시 곁다리로 전문가주위에 대한 맹신이 어떻게 사회를 위협하는가에 대한 개인적 소견을 남기고 다시 본주제로 돌아가려 한다. 여성은 신체적 특성상 질염에 노출될 확률이 높다. 성관계에 의해 걸릴 수도 있지만 감기처럼 면역력이 저하되어도 자주 발병할 수 있는 흔한 질병이다. 그런데 질염으로 병원을 찾으면 좀 황당한 의사를 만나게 될 때가 있다. 남자 의사들 대다수가 질염진단을 내린 후 도덕적 훈계질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옷차림부터 연애스타일까지 내 개인적 성향이나 선택에 대한 주의를 왜 자신들이 검열하냐는 말이다. 한 번은 약을 먹어도 질염이 낫질 않아 3차 병원까지 가게 되었는데 최종 진단은 자궁경부의 세포이형으로 경부에서 생기는 출혈이 문제였고 그것은 내가 섹스를 잘 못 해서도, 꽉 끼는 옷을 입어서도 아닌 일종의 유전적 결함이었다. 자신이 전문가일 수는 있지만 전문지식이 아닌 자신의 도덕감으로 진단하는 사람은 진짜 질병을 놓친다. 내가 그 의사를 믿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전문가주의는 전문가의 지식과 실력을 존중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신념이다. 유투버는 전문지식을 활용해 사회적 규범까지 통제하려는 비민주적 태도를 보였기에 문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멸종위기종의 동물을 위협하는 문제가 단순히 고양이 하나 때문일까. 좁은 서식 환경, 기후 변화 등등 위협의 요소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데도 불구하고 눈앞에 놓인 불편한 사실만 제거하면 모든 것이 완벽해질 듯이 해법을 내놓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더 황당했던 것은 생태운동계 역시 일개 유투버와 별반 다르지 않은 문제 설정 방식으로 토론회를 개최했다는 데 있다. ‘생태계’를 지켜야 한다고 하지만 그 생태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대중용 자연다큐 수준처럼 낭만화(타락한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에덴동산처럼) 되어있다면, 도시의 길고양이에게 닥친 해법은 집단 안락사 말고는 없을 것이다. 도대체 이 지구상에 인간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있을까. 인간의 모든 욕망과 욕구를 반영하지 않는 생태계가 정말 생태계인가. 생태계를 지키자고 구호하지만 그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불명확하다. 생태운동계는 문제없이 문제를 푸는 운동 같다. 단지 캣맘, 캣대디를 문제로 지목하는 것은 그들에게 운동의 통시적, 공시적 이해와 그 흐름 안에서 문제를 설정하고 해법을 찾으려는 노력이 시도조차 되고있지 않다고 봐야 할까. 여하튼 고양이를 둘러싼 논쟁을 통해서 보면 아직 역사적, 구조적 이해를 가지고 문제를 짚어가는 운동단체가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길고양이 아니 동네고양이 보호를 위한 운동은 처음부터 전문가를 대동하고 시작한 운동이 아니다. 그래서 그 운동의 굵직한 흐름에서 잔가지처럼 퍼진 사소한 개인의 밥 주기 운동까지 기저에는 동물을 더 이상 물건으로 취급하지 않는, 않아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역사 속 수많은 투쟁에서 얻은 우리의 인권과 시민권 추구과정에 대한 이해와 맞물려 온 짜임새 있는 운동의 흐름과 맞물려 있다. 달리 보면 고양이에 대한 태도 변화는 더 나아가 모든 비인간 생명체를 대하는 태도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중요한 동력이 되어줄 자원이기도 하다. 실제 길고양이 밥 주다 환경 논문 쓰고, 수의사 되고, 동물권 운동가가 되었다는 사람들이 속속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변화가 전문가주의라는 엘리트 중심의 운동으로는 실현할 수 없는 민주적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이런 흐름은 오히려 동물의 해방을 위한 활동을 펼쳐나가는 운동계가 이 민주적 과정을 어떻게 중요한 자산으로 삼을지 고민해야 하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결국 대결은 전문가주의와 비전문가의 대결이었지만 다른 방식으로 얘기하면 동물에 대한 시민의식이 변화하고 있는데 생태운동계와 국가(주요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공간으로서의 국가)는 시대에 뒤떨어진 신념만 내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자, 너구리가 도시로 몰려들고 있다. 우리는 이미 고양이를 통해 문제 설정의 방식과 그 변천사를 짚어봤으니 이제 좀 더 거시적 안목을 갖고 문제를 설정해봐야 할 때가 왔다. 적어도 시민은 스스로 길을 찾아왔다는 것을 증명했다. 고양이 밥 먹는 너구리 영상이나 공유하는 전문가 말고 적어도 이 정도 질문은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너구리가 야생에서 나오는 선택압은 무엇이고, 도시가 너구리를 끌어들이는 힘은 무엇인가”
간단한 질문 같지만 단어 하나마다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문제도 해법도 달라지는 질문이다. 시민들은 생각보다 많이 준비되어 있다. 위 질문에 대한 답을 과연 누가, 어디서 내놓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