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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품은 그림책


<넉점반>

시/윤석중/그림/이영경/창비 


                                                                이서          

 <넉점반>은 한국의 대표적인 동시 시인 윤석중의 시에 이영경 작가의 그림을 더한 시 그림책이다. <아씨방 일곱 동무>를 그린 이연경 작가는 한편의 짧은 시를 16편의 펼침 공간에 앉혀 놓고 1940년대의 그리운 풍경을 소환한다.

 표제지 왼쪽에는 어릴 적 거실에 걸려 있던 커다란 괘종시계가 보이고 <그리움을 담아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에게 바칩니다>라는 윤석중 작가님의 헌사가 쓰여 있다. 괘종 시계 그림을 보며 나는 어릴 적 살던 집 거실에 뻐국기가 튀어 나와 시간을 알려 주는 벽시계가 떠올랐다.  

 중학교 입학 선물로 받은 빨간색 레자로 된 손목 시계을 받고 엄청 뻐기고 다닌 걸 생각하니 당시엔 시계도 사치품이었던 거 같다. 

이 그림책 시대적 배경이 1940년대다. 그 당시에는 시계가 아주 귀했다고 한다. 이 그림책의 아이는 엄마 심부름으로 집앞 구멍가게에 간다. <구복상회>라는 이름의 가게 영감님께 "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냐고요." 묻고, 가게 안에 붙은 방안에서 라디오를 고치던 영감님은 “넉점반”이라고 알려 준다. 

 고유어로 넉점 반은 네시 반이다, 아이는 혹여라도 넉점 반을 까먹을까 봐 집으로 돌아가면서 “넉점 반 넉점 반”입으로 뇌까리면서 간다.

 늦은 오후 해가 지고 아이는 동네 마실을 마치고 해가 꼴딱 진 뒤에 집으로 돌아온다. 이 그림책의 압권이 이 장면이다. 아이의 집과 영감님의 <구복상회>는 지척이라는 거 아이는 해가 꼴딱 질 때까지 무엇을 하고 다녔을지 궁금해지는 그림책이다. 

그림책의 시간은 거꾸로 흐를 때도 있고 한 발 앞서 나서기도 한다. 네시 반에서 해질 무렵까지 그림책 속의 아이에게 흐른 시간은 잠깐 동안, 그러니까 찰나였리라. 

 지금은 27살인 큰 딸에게도 넉점 반의 시간이 있었고, 중2인 작은 딸에게도 넉점 반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두 아이를 키우면서 맞이하는 엄마인 나의 넉점 반은 그때그때 달랐던 거 같다.

그림책을 만나기 전에 나는 아이의 눈높이로 바라보는 시간을 함께 하지 못했다. 늘 쫓기듯 살아가는 엄마의 시간을 아이에게 강요하며 아이에게 “빨리, 빨리와 꾸물럭거리지 말고!”를 외쳤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측은지심이 많은 큰 딸의 넉점 반은 주로 학교 등굣길의 여덟점 반이 되어 안녕하지 않은 날들이 많았다.

 “어머니 채원이가 아직 학교에 안 왔는데 무슨 일이 있나요?”

이런 전화를 받고 아이를 찾아 나서면 놀이터 앞 벤치 아래 고개를 쳐박고 앉아 있는 아이를 보게 된다. 땀을 뻘뻘 흘리며 호박 잎사귀 들고 있는 아이를 보자 안심이 되면서 화도 났다. 

“너 여기서 뭐해!” 하고 말하는데 아이가 나를 보자 갑자기 울면서 더듬더듬 말을 했다.

“학교를 가야 하는데 달팽이가 집이 깨져서...햇빛이 너무 뜨거운데...”

 나는 울고 있는 아이 발아래서 꼬물거리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등껍질이 바스러진 새끼 손톱 크기의 민달팽이가 벌거숭이 몸을 아이가 만든 호박잎 그늘 아래 숨기고 있었다. 아이는 달팽이를 두고 학교에 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달팽이가 말라 죽을까봐 놀이터 입구에 수돗물을 한가득 입에 물고 조금씩 뱉어 주느라 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나는 아이에게 엄마가 달팽이를 집에 데리고 가서 배추잎을 덮고 돌봐준다고 했고 그제서야 아이는 교실로 들어갔다.  안타깝게도 달팽이는 집으로 데려온 뒤 3일만에 죽었다. 아이가 말라 죽을까봐 스프레이로 물을 뿌려줬는데도...

그 이후에도 길냥이 밥 주다 지각하고, 개미 굴 파다가 불개미한테 물려 응급실가고 큰 아이의 호기심과 세상 바쁠게 없는 엉뚱함을 통해 아이들의 잠깐이 어른들의 한참과 많이 다름을 깨닫게 되었다. 큰 아이의 여덟 점반은 부지런히 학교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 여정에 따라 달랐고 설레는 모험인 듯했다. 

 작은 아이의 넉점반은 우주 공간의 시간처럼 무한대다. 집에서 학교까지 7분 거리의 등굣길을 동행하면서 나와 아이가 누리는 시간이 있다. 우리 아파트 동과 동 사이 골목길에 평상이 놓인 곳이 있었다. 나는 매일 아이의 손을 잡고 그 평상 옆을 지나쳐 학교로 갔다. 이 공간을 누리는 아이와 나의 비밀스런 놀이가 있다. 평상 옆에서 주위를 둘러 보고 아무도 안 보이면 나는 아이와 손을 잡은 채 그 평상에 벌러덩 누워 파아란 하늘을 보며 노래를 불렀다. 

하늘에 흘러 가는 흰구름과 초록 잎사귀에 부딪혀 산산히 흩어지는 황금빛 햇살 가닥가닥이 아직도 눈에 본 듯 생생하게 떠오른다.

3분도 안되는 찰나의 순간에 아이와 나의 초등학교 등굣길의 여덟점 반은 하루 하루가 신선하고 흥겨웠다. 아침 등굣길에 만나는 바람에게도 안녕하고 나뭇잎한테도 안녕하냐 안부를 묻고, 경비실 옆 길냥이에게도 안녕하며 가는 등굣길의 넉점반은 아이의 하루의 시작이자 설레이는 우주의 시간이었던 거 같다. 

교문 앞까지 가서 아이 볼에게 입을 맞추며 아쉬운 이별을 하는 나에게 교장선생님은 “어 어머니 여기서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하며 놀리셨다. 일을 하는 엄마로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나에게 아니, 아이와 나에게 주어진 여덟점 반의 힐링은 사춘기를 맞은 딸의 돌발행동에도 웃으며 견딜 수 있는 힘을 준다.

 엄마 심부름으로 길을 나섰닥 얼떨결에 동네 마실 다녀온 아이의 시간은 해가 꼴깍 넘어가도 여전히 “넉점반”인 이 그림책을 읽다 보며  아장아장 마을 산책을 하는 아이의 발자욱을 따라 추억 속의 풍경이 내 마음으로 속으로 성큼 다가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시를 품을 그림책 <넉점반>을 읽으며 아이의 시간을 이해할 수 있으면 차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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